-피플-
김수환 추기경‧노무현 대통령 바보론 체계화
세상 살아야 할 명분 학벌보다 종교에서 발견

이브닝신문 독자에 “정면 승부하시라” 덕담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바보가 잔잔히 세상을 흔들고 있다. 두 해 전 김수환 전 추기경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하며 자신을 낮춘 이후의 일이다. 여기에 얼마 전 한 신부가 ‘바보 Zone’이란 책을 내놓으며 여기에 가세했다. 누구나 자신 안에 바보지대인 ‘바보 존’ 하나씩을 품은 채 살고 있다고 설파했다. ‘덜 떨어졌다’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이던 바보들 안에 들어있는 숨은 저력을 간파하고 바보 특유의 우직함이 세상을 바꾼다고 강조했다. 차동엽 신부(53)다. 책을 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인생은 결국 자기계발의 과정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먹혔다. 책이 나온 지 두 달 만에 판매량 7만8000부를 기록하면서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들어섰다. 저물어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던 세밑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30일 김포시 고촌면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미래사목연구소에서 차 신부를 만났다. 그는 언어가 만들어낸 파급력에 새삼 놀라워하고 있다.
▲저자 차동엽과 독자 차동엽의 만남
계보가 있는 바보였다. 앞서 김수환 전 추기경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먼저 바보에 심취했었다. 바보론의 계보를 잇기 위해 ‘바보 Zone’이란 책을 쓴 것 아니냐는 질문에 차동엽 신부는 “삶으로 어르신이 된 분들이 있었다”고 운을 뗐다.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저 바보스러움으로 살다가 가신 그 분들이 놓친 바보론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했다.” 뿌옇게 무언가 있긴 있는 것 같은 바로 그것을 정리하고 싶었다고 했다. 차 신부는 “내가 첫 번째 수혜자”라고 말한다. 가끔 스스로도 감동을 받는다는 거다. 저자 차동엽, 독자 차동엽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종교적 색채 배제된 울림
2년여의 집필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 ‘바보 Zone’은 본래 타고난 각자의 바보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으로 행복과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에선 ‘성장’이라 하고 불교에선 ‘정진’이라 한다. 하지만 종교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 통하는 원리를 모르면서 자기계발에 피상적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처녀작 ‘무지개 원리’에 이어 대중서로서는 두 번째 저술인 이번 책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색채는 배제됐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인생해설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는 그저 대중을 향한 행복과 성공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가톨릭계에서 조용히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에는 이러저러한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아예 내놓았는지 이젠 별말이 없다”며 호쾌하게 웃는다. 그 경험으로 체득한 세상의 바보들에게 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내놓는 과정에서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내놔봐라, 용기를 가져라’고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성공과 행복은 분리될 수 없다
바보와 성공이 왠지 상충되는 것 같다는 의문에는 “바보에는 객관적인 잣대가 없다”는 말로 대답했다. “주관적이다. 세상의 잣대가 어떻든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면 성공이다.” 세간에서 흔히 생각하는 성공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는 구도는 이렇게 깨진다. 성공론과 행복론은 애초에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는 것이 차 신부의 주장이다. 성공론의 폭을 한층 넓혀놓은 셈이다. 내친 김에 더 물었다. 머리로는 물론 이해를 하지만 결국 실천의 문제가 아니냐. 이 질문에는 “당당한 바보가 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치가 있는 바보스러움을 자기계발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활성화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내공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의 바보는 사람이 살아야 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었다.
▲미래는 ‘오래된 것’이다
차 신부의 ‘바보 Zone’에는 사자성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다’는 뜻의 ‘대지약우’(大智若愚)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신령한 마음이 있다’는 ‘지우이신’(至愚而神) 등이 바보론을 부연하는 데 쓰였다. 사자성어는 그의 철학이었다. “마흔 살을 넘어서자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그는 사자성어를 통해서 미래에 대한 관통력을 갖게 됐다고 토로한다. 지혜를 벌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찾아야겠다는 깨달음도 얻게 됐다. 그 과정에서 다분히 역설적인 “미래는 오래된 것”이란 신념이 생겼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결국 옳은 것이 승리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정치에서 발견하지 못한 답을 찾아
차 신부는 198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뒤늦게 사제의 길에 들어선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모래시계 세대라고 말하는 그는 “이 세상 정치에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거 종교인이 됐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호황기였다. 신부가 되겠다는 이들의 숫자도 많았거니와 종교가 민족의 자유와 정의 구현을 위해 끝까지 투신할 수 있는 길이 돼줬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할 명분을 좋은 학벌보다 종교에서 찾아냈다는 얘기다. 외가 쪽이 전통적으로 가톨릭집안이었던 영향도 없진 않았다.
▲세상을 외면할 수 없다
현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차 신부는 자신을 그저 큰 조직의 일원이라고 낮춘다. 원래 ‘사제가 신도들을 구원의 길로 이끈다’는 사목의 의미를 차 신부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기원이 있다. 1965년 전 세계 주교들의 회의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사목은 가톨릭이 돌봐야 할 대상이 비단 신도가 아닌 모든 사람으로 영역을 넓힌다. 교회가 스스로 가둬놓았던 울타리를 걷어낸 것이다. 가치관의 대혼란을 겪고 있는 세상을 외면하고 신도들만 돌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는 그 의미를 차 신부는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바보로써 행복과 성공을 얻는 방법을 대중에게 제시하겠다는 그의 철학적 배경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승풍파랑, 정면으로 승부하라
올해 차 신부는 처음으로 안식년을 맞는다. 보직에 대한 부담을 덜고 바보론에 보다 더 천착하겠다는 것이 그의 신년 계획이다. “후속에 대한 빠른 진행보다는 불교식으로 ‘화두’를 품고 바보론 문화의 파급을 위해 몇 년간 더 머물” 구상이다. 나라 걱정하는 일에선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그가 새해 국가를 위한 바람은 통일이다. 아시아 삼국지의 주역이 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응원부대를 자처하는 역할을 그린다. 이브닝신문의 독자들을 위한 덕담 한 토막을 사자성어로 부탁했다. “‘승풍파랑’(乘風破浪), 바람을 타고 나가 파도를 깨라는 뜻이다. 도전과 고난에 정면 승부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관악산 기슭 난곡 달동네에서 아버지 일을 도와 쌀과 연탄배달을 했다는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며 차동엽 신부는 “감사하기 짝이 없다”고 말한다. “가난의 현장에 없었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추상적이었을 것”이라며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은진기자 jj@ie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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