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도 수원제일평생학교 교장, 내가 가진 ‘배움’ 나누고 싶었다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1.01.10 15: 50

-피플- ‘야학30년 헌신’
 
대학 1학년때 선배 따라나섰다 야학과 인연

지원금 없던 시절 운영비 위해 직업도 바꿔
정규학교‧입시교육에 뒤처진 학생 도울 것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야학은 배움의 또 다른 열쇳말이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기초 학력 기회를 놓친 저학력 성인은 약 590만명. 이런저런 이유로 배움의 기회조차 빼앗겨야했던 이들이다. 야학은 이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김아무개씨는 은행 업무를 혼자서 볼 수 있게 됐고 최씨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아빠가 됐다. 검정고시를 마친 임씨는 대학에 들어가 평생소원을 이뤘다. 인생의 8할을 야학과 함께 해온 이가 있다. 수원제일평생학교 박영도 교장(53)이다.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는 야학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야학 폐인’인 셈이다. 그의 보물 1호도 늦깎이 제자들이다.
 
▲대학시절, 야학과의 인연
야학을 찾는 이들의 애절함은 시대마다 변해왔다. 박씨에 따르면 1970~80년대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대신 일터에 나가는 근로 청소년들이 검정고시를 대비하기 위해 야학을 많이 찾았다. 반면 90년대 들어서는 가정주부와 노년층들이, 최근엔 평생교육 개념으로 바뀌면서 다문화 이웃들도 문을 두드린다. 학교를 뛰쳐나온 10대부터 노인들까지 모두가 그의 제자다. 1800여명 정도가 그와 함께 호흡했다.
박 교장이 야학과 연을 맺은 것은 1978년 영남대학교 식품가공학과 1학년 때다. 무심코 선배를 따라나선 그날 뒤부터였다. 경북 선산(현 구미)에서 태어난 그는 돈이 없어 공부할 기회를 빼앗긴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학기 동안 교사로 봉사하는 선배를 도와 학교 청소 등의 허드렛일을 맡았다.
 
▲운명, 직업까지 바꾸다
1980년대 야학은 주로 빈민촌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부방이자 대학생들의 아지트 같았다. 박씨도 당시엔 여느 친구들처럼 민중가요를 불렀다. 하지만 야학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인 줄만 알았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후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등이 이어지면서 시국은 불안했고 야학 탄압이 계속돼 학생들은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다”고 박씨는 회상했다.
그해 박씨는 심적인 방황기를 겪으며 군대로 향했다. 그에게 야학은 운명이었던걸까. 군대 제대 후 복학생이던 1983년 그는 ‘야학 교사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자원했다. 대구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청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구 야학과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러나 2년 뒤 서울의 제약회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YMCA 청소년학교에서 다시 야학교사를 했다. 그러다 회사가 수원으로 이전했고 야학을 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실감했다.
“결국 6년여의 YMCA 교사 생활을 정리했다. 그런데 그만둔 지 10개월만에 정류장에 붙어 있는 야학교사 모집 전단이 다시 나를 잡았다. 지금 살고 있는 수원에서였다. 그리고 94년 그렇게 3번째 야학과의 인연은 다시 시작됐다.”
 
▲지원금 없던 시절 자체충당
야학 교육비는 받지 않는다. 교사들은 모두 봉사자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전기료, 임대료 등 늘 빠듯하다. 정부 지원금이 없던 시절은 더했다. 모두 봉사활동을 하는 교사들이 작은 돈을 모아 충당하곤 했다. 시설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문 닫을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만은 없었다. 혹독한 현실에서도 눈물겹게 배우는 만학도들이 많았다. 교사들의 의지도 꿋꿋했다. ” 
박 교장은 99년 제약회사 연구소 수석연구직을 그만두고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이유식 등에 쓰이는 원재료를 대기업에 조달하는 벤처기업 ㈜미농바이오다.
그는 “야학에 시간을 내기 쉽고, 학교 재정에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직업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야학은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휴가철에도 그렇고 연말이면 한 번쯤은 모임이 겹쳐 건너뛸 수도 있었지만 야학 수업은 양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최근엔 학교 운영비의 50% 정도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조를 받는다. 하지만 나머지는 자체 충당한다. 교사와 졸업생이 십시일반으로 운영비를 마련하거나 박씨가 나서 발품을 판다.
 
▲나눔의 시작 ‘배움’이었다
대학생 교사 5~6명이 10여명을 가르치던 학교는 부쩍 달라졌다. 현직 교사와 경찰 등 봉사자가 30여명으로 늘었고 남녀노소 150여명의 배움터로 성장했다. 올 3월께는 새 교육 프로그램인 위탁형 대안학교 준비도 마칠 생각이다.
“정규학교나 입시교육에 뒤처지는 학생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나라는 이들을 문제아라고 보고 보살피려고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이 뒤처진 학생들이 학교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생각이다.”
또 다문화 교육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그는 “2세들이 성인이 될 즈음에는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며 이들이 리더로서의 역량을 필 수 있도록 다문화 양성 지도자 과정도 만들 계획이다.
가진 것이 있다면 나눠야 한다는 게 박씨의 지론. 그는 “내가 남보다 하나를 더 소유하게 되면 누군가는 하나를 잃게 되는 게 현실”이라며 “내가 가진 것은 배움이었기에 그것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잡아탄 택시에서 10년전 야학 제자를 만났을 때, 농사만 짓던 환갑 어르신이 우리 야학에서 배운 끝에 방송통신대까지 마쳤을 때, 그럴 때 맛보는 가슴 벅찬 느낌이 제 삶의 원동력이죠.”
낮에는 사장, 밤이면 야학 선생으로 변신하는 박씨의 하루가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kmk@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정(情)이 많은 사람이리라.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인터뷰 내내 “고맙습니다” “ 미안합니다” 연발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에도 따뜻한 캔 커피와 붕어빵이 든 봉투 하나, 그리고 귤이 들려졌다. 먼데까지 와준 기자에 대한 박씨의 배려다. 아무 대가 없이 열정만 안고 야학에 뛰어들었던 그와 다르지 않다. 배움에 목마른 성인들을 가르쳐온 그의 열정은 교과부가 주최한 2010년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에서 개인부문 대상의 수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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