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선수와 구단이 만나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계약금, 연봉, 계약기간, 옵션?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선수의 처지에서 일단 물질적으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구단을 협상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팀이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낸다는 보장은 없다.
단적인 예로 이번 겨울 일본프로야구(NPB) 야쿠르트 스왈로스 '수호신'임창용(35)이 요미우리의 거액을 뿌리치고 원 소속에 남았다. 미국프로야구(MLB)에서는 자유계약선수(FA) 최대어인 '좌완 특급' 클리프 리(33)가 뉴욕 양키스의 더 좋은 계약 조건을 뿌리치고 1년 전 자신을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 시킨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택했다.
임창용은 계약 후 기자회견에서 "야쿠르트 동료들이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와 남게 됐다"고 말했고 클리프 리 역시 "1년전 나에게 아픔을 주었지만 필라델피아 팬들과 구단 관계자에게 좋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며 마음을 빼앗긴 이유를 설명했다. 계약 조건이 상대에 비해 부족하더라도 선수의 마음을 얻어내면 사인을 받아낼 수 있다는 실 예다.

이와 비슷한 계약이 27일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일어났다.
'꽃범호'이범호(30)가 27일 오후 KIA 타이거즈와 계약기간 1년에 계약금 8억 원, 연봉 4억 원 등 총 12억 원에 계약하기로 합의했다. '당연히 우리 선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한화 이글스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반면 KIA는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범호와 속전속결로 계약을 이끌어냈다.
이범호는 지난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서 주전 3루수로 맹활약하며 주가를 높여 2009시즌을 마치고 한화에서 FA 자격을 취득해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이범호는 지난 시즌 1군에서 2할2푼6리의 타율에 4홈런 8타점이라는 기대 이하 성적을 내며 대부분 시간을 2군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이범호는 시즌 종료 후 방출설에 휘말리며 올 시즌 전력외로 평가 받고 보류선수 명단에도 포함됐다. 때마침 한화는 주전 3루수 송광민과 중심타선을 지키던 김태완마저 군입대로 올 시즌 전력에 큰 차질이 예상되자 이범호에게 SOS를 쳤다. 이범호 역시 타국에서 마음고생을 한만큼 '친정팀' 한화로 복귀하는데 진지한 자세로 나왔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한화는 소프트뱅크와 기본적인 이적 합의를 마쳤다고 밝혀 한화와 이범호 사이의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한화는 두 달 넘게 이범호와 마라톤 협상을 지속했지만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깊이 생각해봐야 할 점은 한화와 이범호가 9차례나 만나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범호가 한화 관계자와 9번이나 만난 건 '한화로 복귀하고 싶다'는 암묵적인 간절한 표현이었다. 어떻게 보면 선수 처지에서는 자존심도 굽힌 저자세였다.
그러나 한화는 "이범호가 다년계약을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협상 테이블을 철수했다. 지난 1년동안 일본에서 워낙 힘든 시간을 보낸 이범호였기에 한국에 돌아오고픈 마음은 간절했다. 이범호 역시 한국에 복귀한다면 친정팀에서 뛰고 싶다고 말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반면 KIA는 27일 소프트뱅크 스프링캠프 참가를 위해 출국한 이범호와 계약을 발표했다. 모두가 놀란 깜짝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KIA는 소프트뱅크에 이적료도 지불하지 않았고, 이범호의 자존심을 살려주며 마음을 얻었다.
이범호의 계약 발표 직후 김조호 KIA 단장은 "최근 이범호의 영입을 결정하기로 하고 구단에서 준비를 했다. 무엇보다 타선 보강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가 필요했다. 이번 시즌 타선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높은 기대감을 나타냈다.
단순히 계약서만 놓고 보면 계약금과 연봉이 절대 조건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범호는 이번 겨울 한반도 맹추위 만큼이나 가슴이 차가웠다. 어떤 날에는 꽁꽁 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KIA는 적극적이고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협상 자세로 이범호의 마음을 녹였다.
이범호는 지인을 통해 "한화는 나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는 말만 남겼다.
agass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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