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11월2일 2000시즌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 회의장. 한화가 1라운드 8번째 지명권을 행사했다. 당시 스카우트 팀장을 맡았던 정영기 한화 2군 감독이 유심히 지켜본 선수가 하나있었다. 그의 이름이 불리자 모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 감독은 확신이 있었다. "당시 우리 팀에는 내야수가 부족했고, 어린 야수가 필요했다"며 그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정 감독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이범호(30)는 한화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러나 데뷔 초 이범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고졸 신인으로 69경기에 출장했지만 타율 1할6푼2리. 이듬해에도 71경기에서 타율 1할9푼6리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수비도 불안한데 타격마저 보잘 게 없었다. 하지만 한화는 진득하게 믿고 기다렸다. 2002년부터 이범호는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생애 첫 3할 타율을 돌파하며 김태균과 함께 팀을 이끌어나갈 미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2005년부터는 정상급 선수로 뛰어올랐다. 유격수에서 3루수로 포지션을 옮긴 이범호는 한 방과 결정력을 갖춘 대형 3루수로 커가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데뷔 후 가장 많은 26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실책은 15개로 전년도보다 정확히 절반을 줄였다. 당당히 골든글러브까지 거머쥐었다. 김태균과 함께 한화가 자체적으로 키워낸 '명품' 선수로 떠올랐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참가 이후에는 명실상부한 특급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범호는 한화의 자랑거리였다.

한화는 이범호를 아꼈고, 이범호는 한화를 사랑했다. 야구 외적으로 남다른 리더십과 정을 지닌 이범호에 대해 구단 안팎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다. 구단 관계자들은 "나중에 지도자로도 성공할 것"이라며 애정을 보였다. 이범호도 "한화가 좋다. 애정이 듬뿍 밴 팀"이라며 팀 자랑을 잊지 않았다. 비록 2009년 FA가 된 후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로 진출했지만 이범호는 계약 후에도 구단 행사에 빠지지 않으며 '한화맨'임을 자처했다. 2010년 한화의 홈 개막전에도 이범호가 보내온 화환이 대전구장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이범호는 일본에서 부진했다. 국내 복귀설이 나돌자 그의 팀은 당연히 한화만 거론됐다. FA 신분이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범호는 한화맨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이범호는 직접 구단 사무실을 방문해 청첩장까지 돌렸다. 그러나 이후 본격적인 9차례 협상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복귀 불발로 이어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KIA가 물밑에서 접촉해 이범호의 마음을 돌렸다. 한화로서는 충격이었다. '내 선수'라고 생각한 선수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다른 팀에게 빼앗긴 모양새가 돼 허탈함은 극에 달했다.
한화의 꽃이 이제는 호랑이굴의 범이 됐다. 한화 구단 관계자는 "아쉽지만 범호가 KIA에서도 잘되길 바란다"고 했다. 11년 인연의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었던 선수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다. 그러나 이왕이면 같은 팀에서 잘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구단이든 말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이범호를 떠나보낸 한화의 사정이 그렇다. 아쉽게도 한화의 꽃은 이제 없다.
waw@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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