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숙한 연기‧독특한 무대연출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우리 모두는 운명 앞에 눈 뜬 장님일 뿐이다.” 신이 짜놓은 운명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미친 듯이 절규한다. 결국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그는 ‘운명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알려주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자신을 옭아맨 운명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항거. 테베의 왕자로 태어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지만 결국 자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함께 가장 상징적인 비극의 인물인 ‘오이디푸스’가 보통의 남자로 무대에 섰다.

“안다는 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할 때 얼마나 부담이 되는가.” 신들 몰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 눈이 먼 예언자는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을 찾아와 다그치는 왕 오이디푸스에게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보고도 알 수가 없는 무지한 두 눈을 가진” 오이디푸스에게 저주 같은 말을 쏟아낸다. “아침에는 아비를 먹고, 한낮에는 어미를 먹고, 저녁에는 제 두 눈을 파먹고 헤매는 짐승. 당신의 적은 바로 당신이오.”
거스를 수 없는 비극적 운명에 처절히 고뇌하는 그리스 신화 속 ‘오이디푸스’가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극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는 신화적 초인성을 버리고 평범한 한 남자로 등장한다. 그는 그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인 사람을 죽이고 왕이 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했을 뿐이다.
작품은 신이 정해놓은 운명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을 기원전 5세기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의 틀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2011년의 구어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로 풀어냈다. 과연 운명이란 것이 있는 건지, 있다면 정말 거역할 수 없는 건지, 운명과 맞닥뜨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채근한다.
삼각형 무대에는 9m쯤 되어 보이는 검은 절벽이 거의 수직으로 서 있다. 벽에는 인간 군상들의 얼굴이 분필로 그려져 있고 드문드문 박힌 봉에는 오이디푸스가 통치하는 도시에서 역병으로 죽어가는 시민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때로는 울음을 때로는 조소를 토해내며 ‘배고프다, 살고프다’를 외쳐댄다. 저주받은 도시 테베의 첫 인상은 암울한 절망 그 자체다.
지난해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국립극단이 처음 내놓은 작품이다. ‘레이디 맥베스’ 등 주로 강렬한 작품으로 관객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돌덩이 하나씩을 얹어온 한태숙이 연출했다. “어떤 형식에도 갇히지 않겠다”던 그의 말은 선언처럼 지켜졌다. 오브제 연출을 맡은 미술가 이영란과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원일의 실력에 힘입어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영란은 대형 벽을 오르내리며 분필로 벽화를 그려내고, 원일은 아쟁으로 가슴을 뜯어내는 듯한 연주를 한다.
‘오이디푸스’ 역의 이상직을 비롯해 정동환, 박정자, 서이숙 등 굵직굵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 원숙한 정극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서울 명동 명동예술극장에서 내달 13일까지 절제와 압축, 생략과 균형의 묘미를 살린 절대 미학을 만날 수 있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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