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축구계를 호령했던 호나우두(35, 브라질)의 본명은 호나우두 루이스 나자리우 데 리마(Ronaldo Luíz Nazário de Lima). 브라질 빈민가서 1976년 태어난 호나우두는 열 살이 되던 해 유소년 축구팀 선수가 되면서 본격적인 축구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유소년 클럽에서부터 천재적인 득점력을 바탕으로 1993년 브라질 1부리그 크루이제루와 정식 프로선수 계약을 맺었다.
브라질이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24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일궈냈을 때 그는 정상의 자리에 선 상태가 아니었다. 펠레가 17세 때 1958년 스웨덴 월드컵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면 그는 놀라운 천재성만 인정받아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됐을 뿐 베베토 등에 밀려 출전시간은 1분도 얻지 못했다.
미국 월드컵 이후 유럽무대로 진출한 호나우두는 경이로운 능력을 선보이며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1997년 열린 코파 아메리카서 6경기서 7골을 터트리며 득점왕과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호나우두는 승승장구했다.

또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호나우두는 당당히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에선 '영원한 투톱'으로 불리던 호마리우와 함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호주를 6-0으로 대파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프랑스 월드컵서도 호나우두는 단연 발군이었다. 브라질 국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승전서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를 꺾고 올라간 결승전에서 호나우두는 경기 전날 발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나우두는 결승전에 출전했다. 마리오 자갈로 감독은 걱정이 많았지만 에이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결승전에 임했지만 결국 프랑스의 수비를 뚫지 못한 채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호나우두는 월드컵 준우승에 그쳤지만 프로무대에서는 최고의 모습을 선보였다. 월드컵이 끝나고 시작된 세리에 A 1998~1999 시즌에 잦은 부상으로 인해 14골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당 시즌 터트린 골 중 7개가 페널티킥일 정도로 그는 부진했다. 설상가상 호나우두는 1999~2000시즌 십자인대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1999년 11월에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오랫동안 출전하지 못하고 오로지 재활에 매달렸다. 2000년 기나긴 재활을 거쳐 부상에서 회복돼 복귀했다. 하지만 라치오와 복귀전서 교체 투입된 지 3분 만에 다시 오른쪽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지면서 그라운드서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재수술을 통해 와신상담하던 호나우두는 2001~2001 시즌 후반기에 복귀해 9경기 7골을 넣어 브라질 대표팀 복귀에 청신호를 알렸다. 당시 부진을 면치 못하던 브라질 대표팀도 황제의 복귀에 힘을 얻었다.
2002 한일 월드컵서 호나우두는 히바우두, 호나우디뉴와 함께 ‘3R’ 공격라인을 구축하며 대회 내내 맹활약을 펼쳤고 브라질을 통산 4번째 우승으로 이끌며 4년 전의 설움을 단번에 씻어내 버렸다. 8골로 득점왕을 차지했고 연말에는 FIFA(국제축구연맹)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까지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호나우두는 2006년 독일 월드컵서 팀은 8강전서 고배를 마셨지만 위대한 기록을 세웠다. 일본과 조별리그 경기서 2골을 넣으면서 월드컵 통산 14호골을 기록했다. 또 16강전인 가나와 경기서 한 골을 터트리며 15골을 마크, 독일의 전설적 공격수인 게르트 뮐러의 종전 기록을 깨고 현재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0bird@osen.co.kr
<사진> 호나우두가 2006년 월드컵 16강전서 가나 골키퍼 리처드 킹슨을 제치고 월드컵 개인 통산 15번째 골을 터뜨리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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