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시민․여성 500년 파노라마
종이책 종말? “입 다물고 지켜봐”
마거릿 윌리스|408쪽|황소자리

[이브닝신문/OSEN=오현주기자] “하인들이 쓰기를 배워 가족에게 안부편지를 보내고 싶어한다면 또 일요판 신문이며 ‘인간의 의무’를 읽고 싶어한다면 나는 말하리라. ‘손닿지 않을 만큼 먼 곳의 것을 가지려 하지 말고 있는 자리에서 편안함을 만끽하라’.” 노동자에 대한 교육은 물론 책읽기를 통한 지식 취득에 결사반대하던 귀족과 상류층의 비아냥거림은 노골적이었다.
수백년 동안 영국 정부는 교회 등과 손잡고 지식권력을 통제했다. 하층계급과 여성들까지 책을 읽게 된 건 불과 100년도 안 된다. 1543년 헨리 8세는 여성이나 노예에게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내리지만 사정은 오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DH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이 재판에 붙여질 당시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아내나 하인에게 이 책을 읽는 것을 허용하겠냐’고 물을 정도였다.

영국에서 독자부터 학생, 사서, 편집자, 도서판매인, 출판인, 작가에 이르기까지 일곱 단계를 거치며 ‘평생 책과 함께 보냈다’고 토로한 저자가 500년에 걸친 책 이야기를 풀어놓앗다. 인쇄도서가 보급된 16세기부터 새로운 IT제품이 나올 때마다 종이책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요즘까지 영국인들의 독서일지를 꾸민 셈이다. 책에는 문자의 유구한 역사 따위는 없다. 시대와 지역을 표상하는 다양한 책벌레들의 애서에 관한 기록만 가득하다.
17세기까지 값비싼 물건이던 책은 선택된 계층의 독점적 소유물이었다. 그들 가운데 ‘책은 방을 꾸미는 가구다’란 말을 실천했던 1500년대 후반 영국 베스 하드윅이란 부르주아 가문의 서가를 들여다봤다. 그는 특별히 책을 좋아했다기보다 네 번에 걸친 지식인들과의 결혼 덕분에 여러 책을 접하게 됐다.
“신사 여러분, 고풍스러운 가죽 표지를 보시면 오래된 책이라는 걸 아시겠지요? 아, 여기 2실링 나왔습니다. 더 거실 분 없으신가요?” 책이 도서판매상에 의해 거래가 되기도 했던 때도 있다. 1704년 어느 날 경매관련 기록은 “책을 충분히 읽고 싫증이 날 때 가져오면 1실링에 그 책을 다시 살 사람을 연결해주겠다”는 상인의 말재간을 풀어놨다.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책 없이는 살 수가 없네’라고 썼던 토머스 제퍼슨 미국 제3대 대통령의 광적인 도서수집도 소개됐다. 제퍼슨은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초반까지 신대륙의 어려운 여건에서 수집한 6000여권으로 평생 4곳에 도서실을 꾸몄다.
노동자들이 값싼 소설책의 보급으로 삶의 고단함을 씻어냈던 건 1800년대 초반이다. 가죽장정의 고급판본이 아닌 값싼 소책자 형태의 소설이 유행하면서 책은 대중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수만 부짜리 베스트셀러가 양산된 것도 이 즈음이다.
500년에 걸친 이야기 끝에서 전망한 책의 미래에는 저자의 굳건한 믿음이 실렸다. 첨단 스마트폰이 나서도 책의 종말을 쉽게 보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다. 1990년대 초 CD-ROM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호들갑스럽게 책의 끝을 단정했던 실수를 돌아보며 “현명한 사람이라면 입을 다물고 책의 세계가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란 자신에 찬 낙관론을 내놨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도 모르고 한 신사가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데 열중하고 있다. 1837년에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들어간 조지 크루생크의 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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