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야구 혁명아' 요나미네, 85세로 타계
OSEN 이상학 기자
발행 2011.03.02 07: 57

일본프로야구 혁명아가 눈을 감았다.
일본 언론은 지난 1일 오후 요나미네 가나메의 타계소식을 일제히 긴급보도했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외국인선수로 요미우리-주니치에서 플레이한 뒤 주니치에서 첫 외국인 감독까지 역임한 요나미네는 지난 1일(한국시간) 지병인 전립선 암으로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향년 85세. 하와이 마우이섬 태생 일본계 2세로 본명은 워리 요나미네다. 장례식은 호놀룰루 시내에서 실시하지만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도쿄에서도 작별회를 따로 열 예정이다. <산케이스포츠>와 <스포츠호치>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요나미네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 요나미네가 걸어온 길

일본계 2세로 일본으로 오기 전까지 미국 프로 풋볼의 명문 샌프란시스코 49ers의 하프백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다 야구로 종목을 바꿨는데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1951년 요미우리에 스카우트됐다. 요나미네는 미국에서 교육 받은 과감한 주루와 격렬한 슬라이딩 그리고 외야와 벤치를 전력질주로 왕복하는 등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로 일본프로야구에 선풍을 일으켰다.
<산케이스포츠>에서는 요나미네를 '일본의 야구에 스피드를 반입한 혁명아였다'고 소개했다. 1951년 6월 주니치전 대타로 데뷔 첫 타석에 들어선 요나미네는 경기 종반 1·2루 상황에서 초구에 번트를 댔는데 3루 라인에 걸치는 드래그 번트를 성공시켰다. 당시 기준으로 번트하면 무조건 희생번트였기 때문에 세이프티 번트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주루 플레이시 상대 내야수의 송구를 방해하는 슬라이딩 기술도 선보였다. 수비 방해의 경계를 넘을 듯 말듯 한 교묘한 플레이는 경탄을 자아냈다. 1951년 9월12일에는 볼넷으로 출루한 뒤 초구에 2루 도루, 2구에 3루 도루, 그 다음 타자의 초구에 홈스틸을 성공하며 1이닝 3도루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야구에서는 요나미네에 대해 리그의 체질을 바꾸고 수준을 높여 놓았다고 칭송했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6년 연속 3할 타율을 마크하는 등 수위타자를 3차례나 차지했으며 1957년에는 센트럴리그 MVP까지 올랐다. 공수주를 두루 갖춘 왼손 중견수로서 요미우리에 머문 10년간 리그우승 8회, 일본시리즈 우승 4회로 거인군 제2의 황금시대를 지지했다. 1961년에는 주니치로 이적했다. 베스트나인에 7차례 선발됐으며 통산 1219경기에서 타율 3할1푼1리 1137안타 82홈런 482타점 163도루를 기록했다.
1962년 은퇴 후 지도자로도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1963년부터 롯데와 주니치에서 타격코치를 맡았고, 1972년 1군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됐다. 주니치 감독 취임 3년째였던 1974년에는 현역 시절 팀 동료로 함께 하며 수위타자를 다투기도 했던 가와카미 데츠하루가 이끈 요미우리의 10연패를 저지하며 주니치에 20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겼다. 뒷날 그는 "선수로서 남긴 기록들보다도 감독으로서 주니치를 우승시킨 것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77년을 끝으로 감독 지휘봉을 내려놓은 그는 세이부 등에서 코치를 지냈고, 1994년에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미국 국적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지금도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는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요나미네는 1988년 오프시즌에 미국으로 귀국한 뒤 하와이주에서 생활했다. 2006년 프로야구 마스터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했고, 2009년 7월16일 오릭스-롯데전이 열린 교세라돔에서 시구를 하는 등 80세를 넘어서도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몇 년전부터 앓고 있던 전립선 암이 지난 1월부터 악화돼 하와이 호놀룰루 시내의 스트로브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달 25일 자택의 양로원으로 돌아왔으나 갑작스럽게 병세가 크게 악화돼 비보를 맞고 말았다. <산케이스포츠>는 '선수로 12년, 코치와 감독으로 26년간 6개 구단에서 일본프로야구 발전에 크게 공헌한 위인'이라고 서술했고, <스포츠호치>에서는 '일본 야구를 바꾼 남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 그를 향한 추모의 말
"초등학생 때 고라쿠엔 구장에서 처음으로 사인을 받았다. 프로에 들어갔을 때 야구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이다. 온화한 인품이셨는데 이런 식으로 작별을 고하게 돼 유감이다". - 왕정치 소프트뱅크 회장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어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비보에 몹시 놀랐다. 현역 시절 공격적인 플레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야수와 부딪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격렬한 슬라이딩으로 야구가 격투기인 것을 가르쳐 준 은인이다. 나의 감독 시대에는 코치로서 젊은 선수에게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주입해 주셨다.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종신감독
"현역 시절부터 몇 십년간 함께 하며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감독으로서 미국의 합리성과 일본 고유의 색깔을 잘 섞어 놓은 야구를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듣고 있었는데 유감이다. 명복을 기원한다". - 호시노 센이치 라쿠텐 감독
"일본의 야구에 혁명을 불러왔다. 전투적인 슬라이딩이 그 일례로 그의 예술적인 플레이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실로 축복되어야 할 훌륭한 일생이었다고 생각한다". - 가토 료조 NPB 총재
"무엇인가 걱정해주고 의지해주신 분이었다. 감독을 그만두실 때에도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이별의 인사를 하셨는데 공연히 외로워서 눈물 지어버린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다카기 모리미치 전 주니치 감독
"또 한 명 야구계에 있어 막대한 공헌과 노력을 하신 선배가 돌아가셨다. 지금은 단지 외로울 따름이다. 명복을 기원할 뿐이다". - 오치아이 히로미쓰 주니치 감독
waw@osen.co.kr
 
<사진>1974년 10월4일 주니치 구장에서 완투승한 호시노를 악수로 맞이하는 감독 요나미네. <스포츠닛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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