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벼룩시장서 산 물건 이야기
만년필·라디오 등 ‘인문학적 추억’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민병일|240쪽|아우라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1960∼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시계’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만화주인공이 들어가 있거나 시계를 덮은 유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손목시계는 구경만으로 족했고, 자명종이 요란한 머리통만한 사발시계라도 선물로 받아들 수 있었다면 바로 행복한 아이의 반열에 올랐다. 하루에 한 번 시계에 꼬박꼬박 태엽을 감아줘야 하는 일도 있었다. 밥 주는 일을 멈추면 시계도 멈췄다. 시계조차 정직한 시절이었다. 지나고 보면 다른 것은 다 감출 수 있어도 시간은 감출 수 없었다.
‘만년필’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만져볼까 말까한 고급 필기구였다. 당연히 졸업·입학선물로 인기를 구가했다. 간혹 만년필에서 새는 잉크로 노트가 망가지는 것조차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 만년필엔 여유가 있었다. 잉크를 넣는 동안 기다림이 필요했고, 잉크를 채우고도 두어 방울 떨어뜨리는 지혜가 있어야 했으며, 글을 쓸 때도 힘 조절이 요구됐다. 사려 깊음이 없다면 친해질 수 없는 인문주의적 사물이 만년필이다.

독일의 벼룩시장에서 저자가 직접 수집한 잡동사니에서 역사와 문학, 미술과 음악, 추억과 회상이란 오래된 얘깃거리를 찾아냈다. 사발시계와 몽블랑 만년필, 진공관 라디오와 몽당연필, 은빛 도시락과 주전자, 연필깎기와 연장통, 고서와 LP, 편지개봉칼과 무쇠솟대 등, 시대에 뒤떨어진 잡동사니에 대한 진지한 말 걸기를 하는 동시에 초현실적인 예술의 오브제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물건들이 놓여 있던 벼룩시장에 대한 저자의 예찬은 멈추지 않는다. 비록 낡은 물건이라도 사고팔 수 있는 문화가 자연스러운 정신의 교역장이면서, 세월이 지나도 강고한 위엄을 잃지 않는 물건의 자존감을 공유하는 소통장이었다.
상상 이상의 것들이 사고 팔리는 시장의 묘사가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더한다. 백년 묵은 의자, 쓰던 그릇, 옷가지들, 심지어 금발의 여대생은 자신이 입던 속옷까지 내놨다. 참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다가와 윗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헌 옷가지들을 입어보고 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풍경도 이채롭게 기록했다. “남이 입던 옷을 사는 그 여자가 짠해 보였지만 내 안쓰러움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옷을 산 그 여자는 당당히 사라져갔다.”

올망졸망한 몽당연필 한 줌을 사오기도 했다. 할머니 한 분이 팔고 있는 그 연필들에 ‘정가’의 두 배인 1마르크(약 600원)를 지불했다고 했다. 하지만 유년의 추억을 되찾는 데 600원은 지나치게 싼 가격이었다.
세상에 ‘널린’ 많고 많은 사물 중 생활의 흔적이 깊이 밴 인간의 ‘거대한 뿌리’를 품고 있는 물건들만이 걸러졌다. 삶이 차곡차곡 쌓인 텍스트이자 결국 이 자리에 놓이게 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기록이 그 물건들이었다고 여겼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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