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비, 나에겐 뭔가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1.03.09 16: 33

일곱 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김미월 외|252쪽|열림원
욕망과 불안 7인7색 테마 소설집

한국 문단을 이끄는 감성 엿보기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떨어져 내릴 뿐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떨어지길 거듭하다 보니 직선이라기보다는 곡선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황정은, ‘낙하하다’)
“그녀가 그날 우산만 챙겨줬어도 비 맞은 몸이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뒤늦게라도 쫓아 나와 내 손에 우산을 쥐어줄 거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뒤돌아본 그곳에는 빗줄기만….”(장은진,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우리 세는 나이로 갓 서른부터 서른일곱까지인 젊은 여성 소설가 일곱 명이 비 이야기를 써내려간 테마소설집이다. 등단 5년에서 10년이 된 이들의 중·단편 7편이 들어 있다. 일상적이면서 물리적인 비를 매개로 삼아, 굵고 강하게 땅에 박히기도 하면서 지겹고 덧없게 날리기도 하는 비의 변화무쌍한 형태처럼 결코 섞이지 않는 독특한 개성들을 드러냈다.
김미월의 ‘여름 팬터마임’에 등장하는 진은 하필 비 오는 날 시화전을 알리는 전단지를 보고 시화전에 찾아간다. 시화전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 전단지 이면에 적혀 있던 시를 백일장에서 그대로 적어낸다. 결과는 장원. 그 시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의 시였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시를 베껴 낸 것이 부끄럽고 또 두려워 문학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
김숨의 ‘대기자들’에는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치과병원에 찾아가 네 번째 순번을 받은 나는 치과의 진료가 언제 시작될지 자신의 대기순번이 끝까지 보장될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낀다. “내가 치과 병원을 찾아올 때만 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내리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때로 비는 예고 없이 내리기도 하니까.” 비는 현실적 요구를 좌초시키는 또 다른 불안이다. 언제까지 내리고 그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는 주제라기보다는 결정적 소재이자 단서다. 낙화와 소멸, 불안정성이란 비가 갖는 상징은 물론, ‘비온다’라는 외연이 가지고 있는 나쁜 날씨라는 본래의 의미를 빌려 작가 자신들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다.
우주처럼 무한한 공간을 끝도 없이 낙하할 뿐인 빗방울 속에(황정은), 사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이들의 고립과 단절이 티슈에 빗대어져 허공에 힘없이 흩날리고(장은진), 시작과 끝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비의 성질은 결국 일상의 모든 불안정성과 연관돼 있더라(김숨)는 것을 알게 된다. 비는 해를 가린 좋지 않은 날씨로서 나쁜 일들을 가져오기도 하고(김이설), 어떤 일을 알리는 기별이기도 전조이기도 했지만(김미월), 사랑과 행복을 찾는 마법의 실마리이기도(윤이형), 삶과 죽음 또 탄생과 멸종을 주관하는 주술적 개념이기도 했다(한유주).
현재 한국 문단을 이끄는 감성과 문장을 가늠하게 한다. 비의 향방을 중심에 둔 기상도를 그려낸 것처럼 삶에 빗댄 변주와 치환이 다채롭게 읽힌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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