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껍질에 숨은 ‘나’를 찾아
회계·편집자 등 8개 단편 모음
아주 보통의 연애

백영옥|288쪽|문학동네
[이브닝신문/OSEN=오현주기자] “이정우의 영수증은 내 인생의 도돌이표 같은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턴지점이었다. 나는 영수증이 알려주는 대로 그가 갔던 식당으로 돌아가 오도독 소릴 내며 오돌뼈를 먹고 그가 마셨던 하이네켄 맥주를 사서 마셨다”(‘아주 보통의 연애’).
“H가 출간한 여섯 권의 책은 모두 내가 만든 것이었다. …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을 고치고, 작가가 되는 대신 작가를 보필하며, 쉼표와 마침표를 잘못 끼워넣어 빽빽한 문장을 뜯어내고, 못질하고, 최종 마침표를 찍는 완벽한 ‘대신’ 인생이었다”(‘강묘희미용실’).
현대를 사는 여성들의 욕망과 기호, 사랑과 절망을 감각적으로 그려온 백영옥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앞세워 등단작 ‘고양이 샨티’ 등 여덟 편의 단편들이 실렸다. 칙릿(젊은 도시 여성들의 일과 연애, 취향 등을 다룬 소설)에 몰두하던 이전의 경향을 벗어난 이번 소설집에선 다양한 직업으로 사는 특이한 인간군상이 등장해 정체성을 아우를 수 없는 현대인의 허울에 대해 고민한다.
‘아주 보통의 연애’의 김한아는 잡지사 관리팀에서 일하는 자칭 영수증 처리반이다. 90명의 기자들이 매달 쏟아놓는 영수증을 정산하고 입금하는 일을 한다. 그는 누군가 사용한 영수증만으로 욕망을 해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장 좋아하는 영수증은 이정우의 것이다. 이정우가 제출하는 영수증을 복사해 모으면서 그의 일상을 채집한다.

‘강묘희미용실’에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타인의 소설을 편집하는 일로 대체한 출판사 편집자 강묘희가 나온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듯 처음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한 때 그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으리란 예상을 깬 낯선 상호 하나를 접한다. 경남 사천의 ‘강묘희미용실’. 그는 머리통을 잘라낼 수 없으니 머리카락이라도 자를 생각에 미용실을 찾아 떠난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직업이다. 사생활까지 모두 주변인에게 맡겨버린 삶을 살았던 기업의 CEO(‘육백만원의 사나이’), 고객의 결혼식장을 찾아 기념사진 속에 자신을 끼워넣는 청첩장 제작자(‘청첩장 살인사건’), 고양이에게서 죽은 연인의 체취를 느끼는 인터넷서점 북에디터(‘고양이 샨티’) 등이 출현한다. 그들은 직업이란 외피는 있으나 내면은 상실한, 주소는 있으나 길은 잃어버린 이들이다. 이들 삶의 묘사에서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고 직업이 뭐냐는 묻는, 명함과 프로필로만 대변되는 현대인의 삶이 꿰뚫린다. 한 줄의 프로필로 요약될 수 없는 그들이 정체성의 괴리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은 교묘히 사각명함 뒤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그러다 불현듯 장막이 걷히고 나면 허둥대기 시작한다. 직업은 표제와 본질을 연결하는 매개체일 뿐 몰입할 수 없는 상징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렇게 껍데기 같은 역할 뒤에 숨겨둔 각색된 욕망에 대해 고민한다.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다. 경쾌한 분위기도 이어진다. 이들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것은 마침내 껍질을 벗겨낸 자신과 마주하는 용기다. 정체성을 찾으러 떠난다는 측면에서 썩 긍정적이고, 분절된 사회에서 살아남았다는 측면에서 꽤 천연덕스럽다. “계획에 의한 완벽한 인생 포토폴리오란 게 있기는 한 걸까.” 강묘희의 탄식을 빌린 외줄 직능사회에 대한 예민한 고발도 잊지 않았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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