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자식, 봄날이 같다면…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1.04.08 17: 10

욕망이 만든 가족갈등 표현
오현경 명품연기 볼수록 굿
연극 ‘봄날’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청계산 산불이 아직도 타고 있네. 며칠째 산불이지. 닷새짼가 엿새짼가.” 병약해 보이는 막내아들이 먼 산을 바라보며 탄식이다. 산불 따위가 뭐 그리 큰일이냐는 듯한 나머지 다섯 아들들은 따뜻한 봄볕에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입을 맞춰 외친다. “봄이 싫어. 나른한 게 귀찮기만 하고.” 한없이 자상해보이는 큰 아들이 막 캐온 쑥으로 떡을 해서 이들을 먹인다. 봄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오는 듯한 이 고적한 분위기를 가르는 것은 산불 탓에 먼 길을 둘러 장에서 돌아온 늙은 아비의 호령이다. “이놈들아, 봄날은 짧다.” 한 폭의 동양화처럼 어느 봄날의 서정과 서사를 진하게 그려놓은 연극 ‘봄날’의 첫 풍경이다.
 
봄 한철이 상징하는 것은 짧음이다. 짧은 것은 반드시 아쉬움을 불러온다. 아버지의 회춘하고픈 꿈도, 답답한 산골을 벗어나려는 아들들의 꿈도 모두 아쉬운 한철이었다. 연극 ‘봄날’의 중심축은 나른한 산골, 완고한 아버지를 못견뎌낸 다섯 아들과 자신의 가치관만으로 그들을 묶으려 한 아버지의 대립이다. 하지만 이 갈등은 표면에 드러난 장치일 뿐 작품은 시종일관 봄날이 상징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풀어둔다.
“봄이 몇 번이나 바뀌어야 이 땅이 우리 게 될까. 삶은 콩에 싹 나야 우리 게 되지.” 밭가는 일보다 신세한탄이 더 장황한 아들들은 결국 아버지가 방에 묻어둔, 그의 평생 재산이었을 돈 항아리를 들고 도시로 도망쳐버린다. 젊어지고픈 욕망을 못 버린 아버지에게 주름살을 펴준다는 송진을 얼굴에 발라놓고 눈을 가린 뒤였다.
늙어가는 것, 세월이 가는 것에 대한 비탄은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 됐다. 봄날 아련한 기운이 여름더위가 되버린 어느 날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혼잣말을 뱉는다. “소식이나 전하지…. 그 놈들 얼굴이나 다시 봤으면… 죽기 전에… 다시 봤으면.”
배우 오현경이 아니라면 작품이 어떤 색깔을 띠었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불허전이라고 했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전히 ‘아버지’로 살아있는 그는 27년 전 그 모습을 유감없이 재연한다. 1984년 초연 당시 그는 이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었다. 정확한 대사와 동선을 흩트리지 않는 움직임, 어느 한 곳도 도려낼 곳이 없어 보이는 그의 연기는 객석조차 기죽게 만든다. 진중한 장남 역은 이대연이 맡아 극의 중심을 잡는다. 장성익, 강진휘, 정만식, 박완규, 유성진, 김현중이 아들들로 나왔다.
청계산 산불에 다 타버린 백운사를 떠난 스님들이 그 봄 끝에 돌아왔다. 청계산이 그리워 다시 왔다고 했다. 불탄 백운사를 다시 지으러 돌아왔다고 했다. 떠나버린 그 봄날에 대한 안타까움은 먼 목탁소리로 대신했다. 2009년 한국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뽑혔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17일까지 볼 수 있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화보로 보는 뉴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OSEN 포토뉴스’ ☞ 앱 다운 바로가기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