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회질서·자기 생명까지 거부
모비딕 작가가 그린 소극적 저항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108쪽|문학동네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나는 충격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타협하려는 ‘나’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 월스트리트에서 30년간 일한 초로의 성공한 변호사 ‘나’와 그가 고용한 필경사 ‘바틀비’를 대비시킨다. 변호사의 타협적인 자세에 필경사의 비타협적인 거부가 갈등의 축을 이룬다. 그 중심에는 필경사 바틀비의 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가 있다. 상사인 변호사의 모든 지시에 바틀비는 이 독특한 거절의 말을 되풀이하며 소극적 저항을 한다.
소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1819∼1891)이 1853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멜빌이 미국 금융경제의 중심지인 초기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쓴 작품에 스페인 출신 삽화가 하비에르 사발라의 그림을 입혔다. 미국적 삶을 탐색하는 형식으로 단편소설을 활용했던 문학적 전통이 확인되는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창밖을 내다보아도 온통 벽뿐인 월 스트리트. 자기 삶에 자부심 강한 변호사 앞에 어느 날 기이한 필경사 바틀비가 나타난다. 다른 두 필사원이 번갈아가며 까탈을 부려 골치를 썩던 변호사는 종일 묵묵히 필사만 하는 바틀비를 보며 기뻐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작된 작지만 단호한 바틀비의 거부 의사는 그를 당황하게 한다. 바틀비는 필사본 검증이나 사소한 심부름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유를 묻는 변호사의 해명 요구에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부한다. 변호사는 어떻게든 바틀비를 이해하려 애쓰며 그를 동정하기도 해보지만 바틀비가 필사 업무까지 거부하자 결국 그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이마저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며 자기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바틀비의 소극적 저항은 가장 강력한 결말을 가져왔다. 권력과 고용의 사슬을 거부하고, 계약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무시했으며, 심지어 그가 목숨을 잃게 된 사인이 된 밥 먹는 일까지 마다한 자연법칙의 위배에까지 닿아 있다. 바틀비가 흥미를 끄는 이유는 한 가지다.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거다.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할 때마다 무언가를 당연시하며 살아온 이들의 의문은 커져간다. ‘그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들을 바틀비가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별 말이 없다.
사회적 철학적 상징성이 도드라진 이 소설의 독특함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별개의 주제를 끌어낼 수 있는 데 있다. 고립과 소외에 집중하면 실존주의 부조리가 읽히고, 산업화된 일터의 본질에 집중하면 계급투쟁이나 노동운동이 보인다. 현대인이 심각히 앓고 있는 정신질환이나 허무주의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현대사회를 사는 군상의 변형된 초상화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의사표현은 적극적으로 하고 있지만 존재가치를 잃어가는 현대인과 바틀비는 철저히 대조된다.
번역은 1856년 단행본에 실린 텍스트로 했다고 밝혔다. 1853년 판본의 오탈자를 바로 잡은 후 출간된 것이다. 멜빌 자신이 직접 그 작업을 했다고 한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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