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받는 세상…참아야 하느니라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혹시 싸움 잘하십니까? 논쟁은요?
뭔가 마찰이 생겼다 싶으면 미리 질 준비부터 하는 당신은 ‘소심쟁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분노를 꼭꼭 눌러둔다고 덮어지지 않는 게 인간관계인 만큼 여기서 오는 서러움, 미움 같은 것들을 말끔히 씻어버리는 것은 힘에 부친다. 이쯤 되면 ‘데스노트’를 꺼내들게 마련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공포와 불안감을 몰고 다니는 직장 내 상사일 수도, 말 많고 느려터진 선(후)배나 목숨보다 소중한 애인에 못 이겨 쓴다. 한국 사회에선 직급과 연차로 깔끔하게 교통정리도기 보다 연령주의에 인정주의가 성립되고 학벌, 성별, 텃세 등 상대적 변수가 적용되기 일쑤다. 인(忍)자 새기다, 과감히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거다. ‘데.스.노.트’의 탄생 비화다. 첫 빈칸에는 누구의 이름으로 채워질까. 저주의 주문으로 공책이 꽉 채워질 때면 화가 삭힐까. 하지만 기록하는 과정에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조금이나마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단 주문이 제대로 걸릴지는 장담 못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상사 나빠요~
그는 ‘은근히 겁주고 얄밉게 웃다가 말 돌리고,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면서 정신없이 들이대고, 무턱대고 말허리를 자르더니 갑자기 반말하면서 몰아세우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딴청을 부린다’(박형서 소설의 ‘논쟁의 기술’ 부분).
이 ‘막나가기’ 주술을 외는 마술사는 모든 직장인들의 공공의 적, 직장 상사이자 이모(31·여)씨의 소속 팀장(39·남)이다. ‘내 말이 곧 법’이라는 팀장 때문에 이씨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상상을 한다. 결국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이씨도 더럽고, 치사하고, 비참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120명을 대상으로 뽑은 최악의 상사는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는 상사’(50.7%·복수응답)로 나타났다. 이어 무능력한 상사(39.8%),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상사(37.9%)도 상위에 랭크됐다. 또 개선책 없이 꾸짖기만 하는 상사(33.3%),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상사(30.6%), 불가능한 일도 무조건 하라고만 하는 상사(28.9%), 언어폭력을 일삼는 상사(26%), 사사건건 참견하는 상사(25.7%), 성과를 가로채는 상사(24%), 우유부단한 상사(21.9%) 등이 나왔다. 직장은 합법적인 전쟁터인 셈이다. 주먹다짐도 금지된, 이 우아하고 고상한 직장에서 말단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나쁜 상사 대처법이 절실하다.
→상사의 술수에 당하지 않고, 관계를 해치지도 않으면서 할말은 하는 게 나쁜 상사를 길들이는 최고의 모범 답안이다. 새가슴이라면 이마저도 어려울 터. 이럴 땐 ‘그러거나 말거나’가 나름 대처법이다. 약한 마음 때문에 소심한 복수가 고작이었다면 거듭날 때가 온 셈이다. 케이블TV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주인공만 따라하면 복수의 8할이 완성된다. 커피에 침뱉기, 얼굴엔 철판, 누군가 알리바이로 압박한다 해도 나는 절대 안했다고 잡아떼야 한다. 유리한 주제의 선정,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 돌리기와 문답법,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딴청 부리기, 막나가기, 서둘러 결론 내리기 등이 막내들의 마지막 발악(수단)이다.
●애인 나빠요~
100일째 되는 날 박모(28·남)씨는 여친한테 농담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친, 기분 나쁘다며 집으로 뛰쳐나갈 분위기. 박씨는 여친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사과했고, 두어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기분이 풀어진 여친과 100일을 기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로부터 3개월이었다. 갑자기 그녀에게서 헤어지자는 통보가 날라왔다. 3개월전 그가 한 일이 생각난 게 이유였다.
이건 애교에 불과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온 한 사연은 더 안습이다. 술 먹으면 옛 여(남)친에게 전화질, 밥 먹을 땐 말 많더니 계산할 때면 얌전해지고, ‘내 짐은 니가 니 짐도 니가’라는 공식을 만든다. 옛 애인 못 잊는다며 울더니 덜컥 옛 남친에게로 돌아섰다는 얘기도 들린다. 나는 가해자고 너는 피해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인 때문에 싸움닭 됐다는 사연들은 무궁무진하다. 무한대 반복, 또 반복적인 싸움질이다. 물질공세에 어르고 달래다가도 이도저도 안되면 ‘헤어지자’는 선언만이 남는다. 대체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것이 거스를 수 없을만큼 크게 번질 수 있다. 바라지 않던 길로 빠지는 셈이다. 그것이 남녀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럴 땐 신뢰밖에 없다. 사랑은 장난이 아닌거다. 모자라고 서로 다투는 두 남녀의 결합인 만큼 배려와 아낌없는 칭찬이 연애연장의 지름길이다.
●선(후)배 나빠요~
이거 친형(동생)처럼 주먹을 휘두를 수도 없고. “나는 그때 안 그랬다” “…(침묵)···” 등은 선후배가 서로에게 해서는 안될 금기어다.
한 설문에 따르면 후배들은 선배들에게 ‘수고했어’, ‘잘했어’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했다. 선배들 역시 후배들에게 ‘존경합니다’ ‘멋져요’ 등의 말을 가장 듣고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그것도 몰라’ ‘무식하다’ 등의 단어는 후배들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다. 선배는 후배들이 ‘잘모르시잖아요’라고 무시하거나 대답을 안 할 때 가장 기분 나빠했다.
재수를 한 김모(23)양은 나이가 어린 선배들이 얌체처럼 ‘난 바쁘니까 부탁 좀 할 게’라는 식으로 나올 때 좀 얄밉다. 못 먹는 술 먹는 것도 억울하고, 스펙 없는 선배들의 소개팅 주선도 그만하고 싶다. 선배 최(26·남)씨도 김양에게 된통 당했다. 점심마다 밥 사달라, 저녁엔 술 사달라고 쫓아다니고 전공책 사서 쓸 일이지 빌려달라고 해 놓고선 깜깜 무소식인 게 벌써 네번째다.
→일단 상대의 선과 상식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청춘 아닌가. 모르면 가르쳐주고 충고가 통하는 시기다. 갈등관계에선 상호간 고통의 근원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져도 서로에 대해 맹렬히 쏟아붓던 화살도 웬만큼 없어진다. 당돌하지만 객관적으로 쓸만한 후배다 싶으면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누군가 역시 바로 당신의 데스노트를 작성 중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눈 깜짝할 당신은 아니겠지만(?) 마음 곱게 쓰는 게 좋을 듯 싶다. 누구에게나 그 상황과 처지가 있게 마련. 당장 화부터 내지 말고 이해와 배려의 마음으로 출발하는 것이 인간됨의 도리가 아닐까.
kmk@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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