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팀 비밀병기야. 언제 꺼내들지 몰라".
한화 한대화 감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감독이 말한 비밀병기는 10년차 사이드암 투수 신주영(27).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을 때 한 감독의 시선은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 비밀병기가 아주 중요할 때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주영은 지난 2일 대전 삼성전에서 3-3 동점이던 8회 1사 1·2루 위기에서 나와 2타자 연속 삼진으로 위기를 넘긴 후 1점차 리드를 잡은 9회에도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처리했다. 1⅔이닝 무실점 퍼펙트. 무려 1868일 만에 따낸 감격적인 승리였다. 한대화 감독은 "신주영이 위기를 잘 넘겨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 벼랑 끝 남자

신주영은 지난달 24일 정재원을 대신해 1군 엔트리에 등록됐다. 한대화 감독은 "2군에서 볼이 좋다고 하더라.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감독은 과거를 떠올렸다. 동국대 사령탑 시절 고교 선수 스카우트에 혈안이 된 한 감독의 눈에 '잠수함의 산실' 청주기계공고 출신인 신주영이 들어왔다. 한 감독은 "그때 신주영의 볼이 아주 좋았다"고 기억했다. 2002년 연고팀 한화에 1차 지명돼 계약금 1억3000만원을 받고 입단했다. 그러나 입단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군입대와 부상으로 점점 잊혀져가는 이름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지난 겨울 신주영은 이른바 정리대상자였다. 하지만 한 감독이 마지막 순간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한 감독은 신주영에게 "올해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작년에도 잘릴 뻔 했잖아"라며 신주영을 자극했다. 신주영도 한 감독의 말에 웃으면서 "잘 알고 있습니다"고 답했다. 신주영은 올초 이범호의 보상선수로 돌아온 안영명에게 등번호 11번을 양보하고 00번을 달았다. 그때 한 감독은 "억울하면 야구잘하면 된다"고 했다. 2군에서 담금질한 신주영은 1군에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신주영을 바라보며 한 감독은 "볼이 많이 좋아졌다. 올해 유심히 지켜볼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그게 지난달 25일.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 떴다 비밀병기
지난달 25일 대전 SK전 1⅓이닝 3피안타 1볼넷 1탈삼진 무실점. 올해 신주영의 첫 등판이었다. 이미 1-9로 패색이 짙은 경기. 한대화 감독은 "패전처리를 통해서 컨디션을 보고 있다"며 "우리팀 비밀병기다. 언제 꺼내들지 모른다"고 했다. 29일 잠실 두산전에서 ⅓이닝, 31일 대전 삼성전에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가능성을 확인시킨 신주영은 2일 대전 삼성전에서 긴박한 상황에 마운드에 올랐다. 이날 경기 전 한대화 감독은 "신주영이 던지고 싶어하는 의지가 보인다"고 했다. 3-3 동점이던 8회 1사 1·2루에서 마운드에 오른 신주영은 대타 라이언 가코와 강명구를 연속 헛스윙 삼진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9회에도 땅볼 3개로 삼자범퇴 요리하며 1점차 리드를 지키며 승리투수가 됐다. 지난 2006년 4월22일 대전 두산전 이후 1868일만의 승리.

사이드암으로서 공격적인 피칭이 돋보였다. 29개 공 중에서 20개가 스트라이크였고 최고 구속은 140km까지 나왔다.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걸치는 제구력이 좋았고 떨어지는 서클체인지업이 재미를 봤다. 포수 신경현은 "볼이 좋았다. 특히 서클체인지업이 잘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흔들림 없이 제 공을 뿌렸다. 경기 후 신주영은 "주자가 있어도 큰 부담은 없었다. 2군에서도 마무리로 나오며 이런 상황을 많이 겪었었다. 정민철 코치님께서도 중요한 상황에서 등판할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2군에서도 신주영은 세이브 8개를 올린 마무리투수였다. 그리고 중요할 때 1군에서 불펜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 제2의 박정진
신주영은 "그동안 재활기간이 길어 정말 힘들었다. 어깨 재활에만 4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상무에서부터 도진 어깨 부상은 제대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꾹 참고 견뎠다. 그는 "아프다 안 아프기를 반복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후회없이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게 바로 팀 선배 박정진 때문이었다. 1999년 프로 입단 후 부상으로 오랜 기간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한 박정진은 지난해 우리나이 서른 다섯에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신주영은 "요즘 여기저기서 '제2의 박정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에도 정진이형이 잘하고 계신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진이형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투수 최고참 박정진이 평소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이야기는 "절대 부상을 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주영의 생각도 마찬가지. 그는 "구속이 안 나와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프지만 않으면 된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지금 공을 던지고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재활을 하는 동안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지 몰랐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긴 암흑에서 벗어나 봄날을 맞이하기 시작한 신주영. 박정진보다 8살이나 어린 그에게는 결코 늦지 않은 출발이다. 믿을만한 자원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한화 불펜에도 봄날이 스며들 예감이다.
waw@osen.co.kr
<사진> 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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