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2년 연속 최하위에도 한화는 전력 보강이랄 게 없었다. 한대화 감독은 졸지에 모자와 지팡이만 받은 채 마술을 부려야 할 난처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구단은 "한대화 감독의 용병술을 믿는다"고 했다. 한 감독은 허탈함 속에서도 "마술 한 번 부려보지"라며 호기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스프링캠프에서 한 감독이 줄기차게 찾았던 건 담배와 라이터였다. 시즌 개막 후에도 한 감독의 고민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깊어졌다.
▲ 번뇌의 시기
한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4월의 한화는 팀도 아니었다. 4월 팀 타율은 2할2푼2리에 불과했고 경기당 평균 3.1득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팀 평균자책점도 5.60으로 최하위였는데 1위 삼성(2.85)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4할 승률을 1차 목표로 생각했지만 막상 개막을 하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다른 팀에서는 외국인 투수와 1~2선발을 들이미는데 머리가 정말 복잡했다. 다음날 선발투수 예고가 나올 때마다 '또야, 또'라는 말만 반복했다. 승률 4할은커녕 작년보다도 못할 것 같았다"는 것이 한 감독의 회고. 한 번 약팀으로 인식되고 약점이 잡히자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한 감독은 "그게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부진의 골이 극도로 깊었던 4월말. 한 감독은 담당기자들에게 "요즘 많이 재미들 없을 것이다. 전부 내 탓이다.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감독은 "장성호가 오기 전까지는 정말 타선에서 칠 만한 타자가 없었다. 4월에는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운동장 나오기가 그렇게 싫었다"고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감독은 항상 경기장에 일찍 나와 취재진과 만나 전날 경기를 복기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미스가 난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때로는 후회도 했다. 힘들수록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특유의 블랙유머를 잊지 않았다. "오넬리 어깨는 안 썩었냐", "타율이 볼링 에버리지 수준이다", "싼티를 낸다", "인공심장을 넣어줄 수도 없고", "양준혁, 어서 빨리 준비해", "다니시게가 그렇게 못치냐", "나나 위로해줘" 등이 대표적이다.
▲ 5월 대반전
5월5일 SK에 대전 홈 3연전을 싹쓸이 패배한 그날밤. 한대화 감독은 코칭스태프를 불러 모아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 감독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1·2군 코칭스태프 보직변경을 알렸다. 한 감독은 "내가 감독되면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라며 2군으로 내려가게 된 코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어쩔 수 없었다. 팀 분위기는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뭔가 반전의 계기가 필요했다. 선수단 변화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한 감독의 결단은 팀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다"고 강변했다. 백업에서 주전이 됐다고 만족하지 말고 더 이기려들어라는 메시지였다. 이후부터 선수들이 눈에 불을 키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코칭스태프 보직변경 후 한화는 무려 6차례나 위닝시리즈를 했고 3연패는 한 번도 없었다. 강팀이 된 것이다.

5월12일 잠실 LG전도 터닝포인트가 됐다. 이날 한화는 LG에 0-1로 패했다. 9회 동점을 노리던 주자 전현태가 홈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당하면서 피를 흘린 그 날 그 경기였다. 종료와 동시에 벤치에서 나온 한 감독은 주심에게 짧고 굵게 한마디하고 돌아섰다. 한 감독은 "마지막 판정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이상한 판정들이 많았다. 판정을 잘보라는 뜻에서 한마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 감독은 선수들에게 "팀이 약하면 상대팀들도 심판들도 우습게 본다. 결국 우리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이겨야 강해진다. 이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부터 한화는 홈 쇄도가 적극적이고, 어떤 경우에도 쉽게 안 물러선다.
▲ 야왕의 한수
지긋지긋한 최하위 자리에서 벗어나며 연일 한국시리즈 같은 명승부를 연출하자 한화팬들은 열광했다. 숨어있던 팬들도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승패를 떠나 한화야구가 재미있고 끈끈해진 것이다. 지원이라고는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자원들로 대반전을 일궈낸 한 감독에 대한 극찬도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야구의 왕이라는 의미의 '야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처음에만 해도 "그거 혹시 비꼬는 것 아닌가"라며 반신반의한 한 감독도 팬들의 성원을 직접 느끼며 인기를 몸소 실감하고 있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마다 왕이라고 추켜세우니 한 감독도 어쩔줄 몰라한다. "쑥스럽다. 자꾸 들으니 진짜 같다"며 껄껄 웃는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 감독은 소신있는 지휘력으로 리빌딩을 전개하고 있다. 한 감독은 부임할 때부터 "리빌딩도 결국 성적이 나야 한다. 이겨야 선수들이 큰다"고 강조했다. 구심점이 될 베테랑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강동우 장성호 정원석 같은 베테랑들은 한화 상승세의 가장 큰 힘이었다. 게다가 함부로 선수를 재단하지 않는다. 정리 대상자였던 박정진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수호신으로 재탄생시켰고, 올해는 사이드암 신주영이 이 같은 과정을 밟고 있다. 최진행처럼 젊은 선수는 당근과 채찍을 써가며 키우고 있다. 결정적으로 어린 투수들에게 최대한 많은 선발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만 25세 이하 토종 선발 5인을 구축해 놓았다.

▲ 군림은 없다
최근에는 경기 중 작전도 기가 막히게 떨어진다. 대타 및 대수비·대주자 기용이 적재적소에 이뤄지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성공하는 건 아니다. 대신 실패 속에 반성이 있다. 지난주 박정진을 무리시킨 뒤로는 50개를 던졌을 때 무조건 사흘을 쉬고, 30~40개씩 던졌을 때에는 이틀을 쉬는 것으로 못박았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최선의 길을 찾아가며 선수들과 호흡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길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핵심 포인트를 짚는다. 신경현은 "감독님은 미팅을 해도 맥을 짚어서 1분30초내로 간단하게 끝낸다"고 했다. 짧지만 굵은 메시지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의 별명을 불러가면서 툭툭 던지는 한마디가 격려와 자극의 효과로 톡톡히 나타나고 있다.
왕이지만 절대 군림은 없다. 긴박한 상황일수록 선수들의 의견을 더 묻는다. 최근 자주 마운드에 올라가는 한 감독은 통보 대신 의사를 물어본다. 중요한 상황에서 타자들에게도 강공을 할지 번트를 댈지 의견을 들어본다.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하는 것이다. 한 감독은 "결국 야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선수들이 빛을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수들도 괜히 그런 한 감독에게 '오늘은 왜 안 부르실까'라며 기대감을 갖는다. 한 감독은 "지금 7위인데 4강이라도 가면 어떻게 할건가"라고 의미심장하게 한마디했다. 농담과 비속어를 섞는 중에도 모든 말에 뼈가 있는 한 감독이다. 그의 입에서 4강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waw@osen.co.kr
화보로 보는 뉴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OSEN 포토뉴스’ ☞ 앱 다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