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키친’
국내 초연…대형식당 조리대 그대로 옮겨 눈길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정어리 두 개요.” “대구 넷이요.” “내 송아지 커틀릿 어떻게 됐어요?” “아직도 멀었어요? 빨리요. 빨리.” 요리사, 웨이트리스가 뒤엉킨 주방 안은 난장판이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손님들의 주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손님들이 보이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주문지를 높이 세워 흔들어대는 웨이트리스는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써댄다. 결국 욕지거리가 나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접시는 산산조각난다. 하지만 깨진 건 접시가 아니었다. 주방 바닥에 뒹구는 건 접시의 모습을 띤 그들의 꿈이었다. 연극 ‘키친’이 국내 초연 무대를 열었다.

영국 런던의 한 대형식당 주방. 아침은 고요했다. 가스오븐, 냉장고, 조리대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산처럼 쌓인 접시, 국자와 프라이팬도 잘 닦여 줄지어 걸려 있다. 하지만 이 적막은 얼마가지 못했다. 오븐에 불이 붙기 시작한 순간 정적은 깨지고 전쟁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연극 ‘키친’은 세상의 축소판을 주방으로 옮겨온 작품이다. 넓지만 좁은 거대하지만 작은, 주방이란 제한된 공간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궁극적으로는 음식을 준비하는 기능을 가진 주방이지만 그 곳엔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사는 일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희망이다. 작품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전쟁터에서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꿈을 꿔야 하는지를 묻는다.
무대에는 하루 1500명의 손님이 찾는 식당의 주방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주방기구만 방대한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도 만만치 않다. 독일, 아일랜드, 키프로스, 유대계 등 다양한 민족과 나라 출신의 요리사들이 모였다. 각기 모국어로 떠들어대는 요리사들은 주방칼을 높이 든 다국적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한편이 아니었다. 소통을 막는 다양한 경계 때문이다.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경계는 높고 두터운 벽이 되어 주방과 홀을 가르고, 요리사들의 국적을 가르고, 사장과 종업원의 이상을 가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의 꿈을 가른다.
영국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의 작품이다. 195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했다. 영국 현대극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국내에선 첫 무대다. 방대한 출연진은 물론이고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팀플레이, 대형 주방조리대를 그대로 옮겨놓아야 하는 연출이 섣불리 국내 무대를 시도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 모두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 오븐 소리도 작아졌고. 자 이제 우리 꿈을 얘기해보자고.”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에 말보다 주먹을 먼저 휘두르던 독일인 조리사 피터가 다른 주방 식구들에게 묻는다. 그는 꿈을 말하는 대신 주방 안 쓰레기통으로 기둥을 세우고 장미로 치장해 곧 허물어질 그만의 성을 세웠다. 주방은 꿈을 품게 만드는 동시에 꿈을 잃게 만드는 장소였다.
29명이다. 커튼콜에서야 비로소 한 무대 위에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 배우들이 과연 몇명이었는지 세어볼 수 있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2일까지 공연한다.
euanoh@ieve.kr/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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