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된 과부들의 욕망
OSEN 이은화 기자
발행 2011.06.10 17: 06

고 차범석 5주기 기념작
전쟁통 속 산속마을 풍경
-연극 ‘산불’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에미야! 아니, 저녁은 아직 멀었느냐? 왜 밥을 안 주냐? 응?” 김 노인의 밥 타령이 다시 시작됐다. 뒷산 대나무숲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는데,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 규복은 죽은 채 군인들 손에 들려 내려오고 임신한 과부 사월이가 자살을 했는데, 김 노인은 밥 타령을 멈추지 않는다. 까악까악 울어대던 까마귀가 전조한 예고편은 현실이 됐다. 빨치산을 없애기 위해 산에 불을 놓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가 한 말도 사실이 됐다. 삶과 죽음은 결국 묵직한 ‘한 덩어리’더라는 것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연극 ‘산불’이다.
 
1951년 한겨울. 소백산맥 줄기에 걸쳐 있는 작은 부락에도 6·25전쟁은 스며들었다. 남자의 씨가 마른 이 산골마을엔 과부들만 남았다. 인민군 성화에 부녀자들은 없는 곡식을 차출하고 눈보라를 뚫고 야경까지 나가야 할 판이다.
젊은 과부 점례와 사월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빨치산 규복이 몰래 숨어들면서다.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 덜 떨어진 시누이까지 봉양하던 점례는 돌연 그를 따라 나서겠다 하고, 점례의 밤마실을 눈치 챈 사월은 그를 ‘번갈아 돌보자’고 제안한다. “제발 소원이야. 아무 짓을 해도 상관없으니 그이만은 살려 줘!” 하지만 사색이 된 점례를 뒤로 하고 사월은 가슴을 움켜쥔 채 대나무숲으로 향한다. “염려 말래두.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하니까.”
연극 ‘산불’은 전쟁통에 사내란 사내는 다 잡혀나간 두메산골을 배경으로 과부들이 펼쳐내는 드라마다. 빨치산에서 도망 나온 한 청년을 사이에 둔 두 여인의 애욕과 비극이 큰 줄기를 이룬다. 이들에게 전쟁은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편 가르기일 뿐 결과로서의 비극은 욕망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국면에서 싹을 틔웠다.
극작가 차범석(1924∼2006) 5주기를 기리는 공연으로 준비됐다. 그의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배우 강부자, 권복순, 조민기, 장영남, 서은경 등 스타배우들이 나서고, 임영웅 연출이 가세했다.
1962년 초연하고 장르를 바꿔가며 꾸준히 공연돼 왔다. 1500석 규모의 대극장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물 크기의 초가와 산비탈을 옮겨오고 천장을 뚫고나갈 기세의 200그루 대나무를 심었다. 야심차게 꾸려진 무대와는 달리 내용에서 추구한 변화는 거의 없다. 그저 원작에 충실했다. 아니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다. 피아노와 구음으로 막과 막 사이 흘린 라이브음악도 새로운 시도였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극과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하지만 고전급 명작은 어디에 내놔도 빛을 낸다. 정극의 밀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다. 극단의 고조를 밀어낸 애잔한 여운이 더욱 강렬하다.
무대를 거쳐 서서히 객석까지 차오르는 연기가 사람도 집도 이제 곧 무너질 그들의 기억도 희뿌옇게 만든다. 산불이다. 목이 칼칼해진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26일까지 볼 수 있다.
euanoh@ieve.kr/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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