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본 ‘플레이보이’ 창업자 휴 헤프너의 삶
미스터 플레이보이
스티븐 와츠|544쪽|나무이야기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1953년 미국. 세상은 또 하나의 세계에 맞닥뜨린다. ‘쾌락주의 만세’를 외치는 스물일곱의 젊고 매력적인 한 잡지발행인이 창조한 제국이었다. 최소한 그 제국 안에선 당시 시대를 장악한 이데올로기였던 청교도주의가 제거됐다. 그 대신 욕망의 카타르시즘이 들어섰고, 사회적 강제에 대담하게 맞선 것은 개인의 성적 자유였다. 그 제국은 ‘플레이보이’다. 그 가운데 우뚝 선 휴 헤프너는 선언한다. “당신이 18세에서 80세의 남자라면 플레이보이는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
잡지 ‘플레이보이’의 창업자이자 발행인인 휴 헤프너의 평전이다. 지난 60여년 동안 외설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해온 헤프너의 일대기를 짚었다. 하지만 평전은 감각적인 여자들, 플레이보이 맨션 파티, 질펀한 쾌락, 매끈한 스포츠카 등으로 이미지메이킹되는 도색적인 한 잡지발행인의 단순한 일대기를 벗어난다. 그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평가의 대상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내가 만들려는 건 도시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가볍고 세련된 엔터테인먼트 잡지야. 기본 판매는 여자 누드사진이 보장할 테지만 고급스러운 품격도 유지할 거야.” 달랑 8000달러, 그것도 전당포에서 빌린 그 돈으로 창간된 플레이보이에 헤프너가 걸었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창간된 지 불과 15년이 채 되지 않아 토끼모양의 로고는 전 세계를 강타한다. 헤프너는 500만 독자를 등에 업고 클럽, 리조트, 음악, 영화, 텔레비전 쇼를 망라한 다양한 영역을 거느린 수천만 달러 사업체의 수장이 된다.
그러나 외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잡지가 바꿔놓은 이념이다. 플레이보이는 그 자체로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 됐고, 성적 구속에서 탈피하는 개인의 해방에 물질적 풍요를 얹어 미국적 가치관을 다시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책은 헤프너와 그의 제국이 지난 반세기 미국의 역사를 측정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는 점에 강조점을 뒀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시대의 경직된 순응주의를 추종하는 따분한 결혼지상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 들어선 반전운동을 계기로 대항문화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것은 물론 좌파 사냥에 대한 비판과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기치까지 드높인다.
헤프너의 강력한 ‘일탈’은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게 그를 가둬둔 부모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방종을 넘어서는 성생활과 매호 잡지에 누드모델로 선정되는 ‘플레이메이트’와의 끊임없는 스캔들로 인해 당연히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첫째 부인인 밀드레드 윌리엄스와는 1959년 10년간의 결혼생활을 접었고, 지난해 플레이메이트 출신인 둘째 부인 킴벌리 콘래드와 오랜 별거 끝에 이혼했다.
여든 다섯의 휴 헤프너는 최근 그의 인생에서 다시 한 차례 해프닝을 겪었다. 60세 연하의 연인과 결혼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거다. 연인은 또 한 명의 플레이메이트였다. 세 번째 결혼을 꿈꿔온 진정한 플레이보이의 꿈이 접힌 순간이다.
사진설명: 1960년대 ‘플레이보이 철학’을 작성하는 휴 헤프너와 당시 시카고 미시간 애비뉴를 빛낸 37층짜리 플레이보이빌딩(위). 2002년 핼러윈파티에 나선 헤프너와 여인들(아래).
euanoh@ieve.kr/osenlife@osen.co.kr
화보로 보는 뉴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OSEN 포토뉴스’ ☞ 앱 다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