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기뻤다. 학창 시절 우상과 함께 메이저리그 같은 팀에서 뛰었다는 자체로도".
'써니' 김선우(34. 두산 베어스)의 등번호는 32번. 메이저리그 시절에는 달지 못했으나 신월중 시절부터 그와 함께했고, 지금도 등에 가장 익숙한 번호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른 번호를 썼던 때가 있었다. 휘문고 3학년 시절이던 1995년 47번을 달았던 것. 김선우는 47번을 달고 고교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동시대 국내 최고 투수 중 한 명은 바로 '야생마' 이상훈(전 LG 트윈스)이었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팀 투수진 맏형이 된 김선우. 올 시즌 6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20(6일 현재)을 기록하며 선발 주축 노릇을 하고 있는 김선우가 잠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교 시절의 초심과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허공을 향했다.

▲ 등번호도 신발도 '야생마'처럼
이상훈은 90년대 LG의 에이스로 프로야구를 대표하던 좌완이었다. 서울고-고려대를 거쳐 1993년 LG에 1차지명으로 입단한 뒤 최초의 한-미-일 프로야구를 모두 겪었던 '풍운아' 이상훈은 국내 프로 통산 71승 40패 98세이브 1홀드 평균자책점 2.56의 성적을 남겼다.
2004년 SK로 적을 옮겼으나 기대와는 달랐던 모습에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고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던 이상훈. 특히 그는 1995년 20승 5패 평균자책점 2.01을 기록하며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 당시 고교 최고 투수였던 김선우는 이상훈을 보며 꿈을 키웠다.
"중학교 시절부터 번호가 비어있어 쭉 32번을 달았었다. 그러다가 1994년 18승을 올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이상훈 선배의 활약을 보고 감탄했다. 그래서 고3 시절에는 47번을 달고 나섰다. 던지는 손이나 투구폼은 달랐지만 시원시원하게 타자를 제압하는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 때 나는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 밖에 없었지만 이상훈 선배의 위력적인 모습을 똑같이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김선우가 변화를 준 것은 등번호 만이 아니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이상훈의 스파이크와 비슷한 신발을 신고 마운드에 올랐다. 여기에는 동기생 정원석(한화)의 도움도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이상훈 선배가 멋있었다. 때마침 원석이가 호주에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스파이크를 구했다고 하더라. 그 때 발목도 약간 안 좋던 때라서 원석이한테 '좋은 대학 가고 싶으면 내 신발도 구해줘'라고 반협박(?)을 했었지".(웃음)

▲ "우상과의 한솥밥, 정말 뿌듯했다"
47번 휘문고 에이스로 맹위를 떨치며 청소년대표를 역임한 뒤 김선우는 이듬해 고려대로 진학했다. 1년 간 똑같은 등번호를 달았다는 것 외에 인연이 없던 이상훈과 처음으로 학연이 맺어진 순간이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난 후 김선우는 이상훈과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로 재회했다.
"그 때는 선배와 직접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학교 선후배로도 이어져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199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선배가 주니치 생활을 마치고 서울고에서 개인훈련을 할 때였는데 선배와 친한 기자분들께 요청해 '함께 훈련하고 싶다'라고 간청한 적이 있었다".(웃음)
개인훈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선우는 메이저리그 캠프에서도 마이너리그에서도 이상훈과 함께 했다. '사나이'다운 모습과 투구 스타일을 모두 닮고 싶어했던 만큼 그 시간이 영광이었다는 김선우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때 함께 훈련하면서 이상훈 선배와 조진호(전 SK-삼성) 선배와 같은 방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도 이상훈 선배와 룸메이트였다. 많은 조언을 들으면서 그렇게 미국 생활 초반을 보냈다. 상훈 선배는 경기나 훈련을 마치고 오면 기타를 치다가 잠들고는 했다. 기타를 배웠냐고? 나는 손가락 끝에 굳은 살이 생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웃음)
파이어볼러였던 이상훈과 그를 동경하며 파워피처의 삶을 살았던 김선우. 그 또한 이제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 새로운 야구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초심이 생각났는지 이상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망중한 속 깊은 웃음을 보여줬다.
"후배들 잘 챙겨주고 의리도 대단한 진짜 사나이가 상훈 선배였다. 지난해까지는 연락도 드리고는 했었는데 요즘은 연락을 못 드려 정말 죄송했다. 꼭 다시 뵙고 다시 한 번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farinelli@osen.co.kr
화보로 보는 뉴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OSEN 포토뉴스’ ☞ 앱 다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