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를 처음 만난 것은 제가 한국일보-일간스포츠 체육부 기자를 시작한 1976년 봄이었습니다.
한양대 훈련장을 찾아가 서영무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고 까맣고 똘망똘망한 2학년생 장효조를 만났습니다.
대구상고 시절부터 여러 차례 타격상을 받은 장효조는 그 전 해 한양대에 입학하자마자 춘계리그에서 타격 2위를 차지했습니다.

왼손타자에 간결하고 부드럽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장효조는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팀에 뽑혀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국제야구대회에 출전했습니다.
당시 대표팀 멤버는 허종만 감독, 유백만 코치에 김호중 이선희 계형철 임신근 강용수 황태환 정순명 우용득 신언호 박해종 김봉연 배대웅 김일권 김용철 김재박 구영석 장효조 김차열 이해창 윤동균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차례 국제대회에 출전한 다음 장효조에 대한 평가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는 잘 치는데 해외에 나가면 못 친다”며 ‘국내용’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77년 11월 중미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대회 대표팀 선발을 놓고 김응룡 감독은 고심했지만 국내 대회에서 워낙 성적이 좋은 장효조를 뽑았습니다.
현지에 취재를 가서 지켜보니 장효조는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시진 최동원 등 몇몇을 빼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선배인 데다 선발로 출장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콜롬비아전에서 대타로 출장해 3회말 솔로홈런을 터뜨려 승리에 쐐기를 박아 출장 기회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결승리그에서는 푸에르토리코전에서 선발 출장해 4-2, 역전승에 공헌했고 숙적 일본전에서도 6번타자로 선발 출장해 3-2로 신승을 거두는 데 보탬이 됐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최종전에서도 이겨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국야구가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데 한 몫을 한 장효조는 80년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도 김응룡 감독을 따라 출전해 일본을 이기고 준우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고 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도 뽑혀 한국이 최초로 타이틀을 따내는 데 기여했습니다.
장효조는 대회 최종일 열린 일본과 최종전에서 조성옥-김재박-이해창에 이어 4번타자를 맡았고 역전 스리런을 날린 한대화가 5번타자였습니다.
그동안 장효조는 한양대를 졸업하고 79년에 실업팀 포항제철에 입단해 80년에는 육군에 입대, 경리단서 활동했습니다.

야구 현장에서 자주 만난 장효조는 서울 세계선수권이 끝나고 얼마 후 제게 전화를 걸어와 만났더니 프로 삼성 라이온즈 입단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지는 ‘삼성이 자신을 낮게 평가해 계약금을 너무 적게 책정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삼성 구단에서 제시한 액수는 2500만 원 정도이고 자신은 적어도 4000만 원 이상을 받고 싶은데 구단에서 양보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OB 베어스의 박철순이 첫해 계약금을 2400만 원, 해태 김봉연이 2000만 원을 받았고 프로야구 인기 상승으로 83년에는 두 배로 오르는 마당에 자신의 경력으로 봐서는 구단이 지나치게 저평가하니 프로 선수로 뛸 의욕이 없어졌다며 포항제철에 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강남역 부근 민속주점에서 만나 2시간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앞으로는 프로생활을 해야 한다고 달랜 저는 그 후 삼성 구단 단장을 만나 이야기한 결과 장효조는 계약금으로 3000여 만 원을 받고 라이온즈에서 뛰게 됐습니다.
만 27세에 삼성에 입단해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꼽힌 장효조였으나 첫 해 타율 3할6푼9리에 빼어난 성적으로 수위타자상, 최다안타 공동 1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 홈런 공동 3위(18개),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신인왕은 대표 선수를 오래한 선수들은 대상에서 제외시켜 타율 4위에 공동으로 최다안타상을 받은 박종훈(OB)에게 돌아갔습니다.
본래부터 자존심이 강하고 계약금을 생각보다 적게 받았다고 여긴 장효조는 삼성 구단과 시즌이 끝나고 계약 기간 중에 간간이 불협화음이 들려왔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매년 3할 이상 타율을 보여주었으나 6시즌이 지나고 88년 말 롯데로 2대
2 트레이드(장효조 장태수↔김용철 이문한)가 돼 대구를 떠났습니다.
그라운드에서도 상대팀 팬들이 그가 나오면 “우!우!”하며 소리치면 그는 가슴을 앞으로 더욱 내밀고 그쪽 관중석을 쳐다보며 배트를 들어올리는 제스처를 취해 야유를 받았고 심판들과도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는 롯데에서 92년까지 총 프로 10년간 961경기 출장에 타율 3할3푼1리, 안타
1009개, 홈런 54개, 2루타 157개, 타점 437점, 도루 61개, 사사구 533개, 삼진 289개, 병
살타 31개, 실책 11개를 기록했습니다.
타격왕 세 차례에 ‘안타 제조기’ ‘영원한 3할타자’로 불린 그의 삼진 비율은 3~4경기 중 한 개 꼴로 역대 10년 이상 뛴 선수 중 가장 적습니다. 선구안이 뛰어나 “장효조가 투스트라이크 이후 치지 않으면 볼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의 대구상고(현 상원고) 13년 후배이면서 최고의 타자로 지난 해 은퇴한 양준혁도 볼을 잘 고르는 선수였는데 장효조가 삼진을 12.6타석에 한 번 꼴로 당한 데 비해 양준혁은 9.7타석 만에 한 번 꼴로 삼진을 먹었습니다.
36살에 선수 유니폼을 벗은 장효조는 롯데 코치를 거쳐 삼성에서도 2000년에 코치 생활을 잠시 하고 대불대학 등에서 아마추어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2005년에 다시 삼성 스카우트로 돌아와 작년부터 2군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더니만 갑자기 닥친 병마에 지난 9월 7일 55세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성에 오기 직전 아마 지도자로 떠돌던 시절 만났을 때 그는 “예전에 괜히 마찰을 많이 빚었죠”라면서 씩 웃던 모습이 선합니다.
35년간 그와 가까이 교류했던 저는 “조금만 자존심을 죽이고 살았으면 편하게 지냈을 텐데~”라는 쓸 데 없는 생각에 젖습니다.
OSEN 편집인 chunip@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