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동원, 선수권리 일깨운 고난의 선구자
OSEN 이선호 기자
발행 2011.09.14 17: 16

볼만 잘 던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선구자였다. 
 
고 최동원은 어쩌면 처음으로 야구인의 권리를 주장한 선수였다. 그는 88년 선수협의회 창설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각 구단의 주축 선수들과 함께 선수협 결성을 논의했다. 너무나도 빈약했던 선수복지를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그는 선수연봉인상 상한제 25% 철페와 연금제도 도입 등을 주요 과제로 설정했다.  
그는 고액연봉자였다. 남들처럼 앞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당시 각팀의 주전선수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 9월 대전 유성에서 142명의 선수들이 모였다. 아울러 9월30일 인천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당시 사회적으로 노조결성 러시와 맞물렷고 선수권리를 말하는 최동원의 논리에 모두 마음이 움직였다. 2000년 선수협 파동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첫 번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단들의 와해 움직임과 함께 동조를 약소했던 타팀 동료들이 주저하는 바람에 선수협회는 결성되지 못한다. 대의원 총회 장소를 변경해 대전 계룡사에서 열었으나 구단의 반대로 3개구단 선수들을 불참했다. 결국 참석인원 20명 과반수 미달로 성사되지 못했다. 구단들은 선수협회 관련 선수 20명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으로 압박했고 결국 선수협의회 출범은 와해된다.
대신 주동자로 낙인 찍힌 최동원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이미 연봉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구단과 불편한 관계에 선수협의회 사태까지 엮이면서 눈밖에 났다. 롯데는 최동원을 팀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결국 삼성으로 트레이드시킨다. 88년 11월22일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 유니폼을 입는다. 삼성에서는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 4명이 맞교대됐다.
강제로 고향을 떠난 최동원은 힘을 쓰지 못했다. 89년 1승, 90년 6승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앞선 롯데에서 6년동안 96승을 따냈지만 트레이드의 충격을 이기지 못했고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롯데에서 쏟아부었다. 은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2살이었다.
은퇴 이후 야구인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선수협의회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던 그를 불러주는 구단은 없었다. 은퇴직후 방송의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야구장에 있었다. 겨우 은퇴 10년만에 2000년 이광환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투수코치로 지도자 세계에 입문했다. 김인식 감독이 부임하면서 다시 2005년 한화코치를 맡았고 2군 감독을 역임했다. 2009년부터는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으로 일했다.
 
그의 지도자 인생은 한화가 유일했다. 결국 첫 우승을 안겨준 친정팀 롯데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어찌보면 지금의 선수회의 정신은 88년에 태동됐다고 볼 수 있다. 대신 최동원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프로야구 출범 30년 맞아 그를  선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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