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고 친정 품으로 돌아가는가.
하늘에서 내려온 두 개의 별들이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프로야구 30년사의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고 장효조 전 삼성 2군감독, 고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이 야구팬들의 가슴에 멍우리를 남긴채 하늘의 별로 돌아갔다.
두 전설은 비운의 스타였다. 화려한 현역시절을 보냈지만 타협없는 대나무 같은 꼿꼿한 성격탓에 쓸쓸한 지도자 생활을 보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지도자로 화려하게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이 제공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김성근 전 SK감독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두 고인은 비운의 스타들이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도 그의 말속에는 구단과 불편한 관계에서 그들의 지도자 생활도 상당부문 제약을 받았으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 최동원은 이에 앞서 88년 선수협의회 창립 소동의 주동자로 찍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이미 어깨는 망가졌고 2년만에 외롭게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더욱이 지도자로 출발을 못했다. 친정에서 쫓겨난 팔자 때문이었다.
화려한 현역생활을 보냈더라도 지도자로 성공하지는 않는다. 다만 은퇴하면 지도자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최동원에게는 출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선수협회 주동자로 미운털이 박힌터라 친정팀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고 타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개인사업, 방송출연, 정치계를 겉돌았다. 은퇴 10년만에 한화의 투수코치로 돌아왔다. 그는 지도자로 한화에서 5년 반 동안 일했다. 손을 내밀었던 한화가 아니었다면 지도자 경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롯데와의 결별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롯데와의 소원한 관계가 이어지다 작은 계기가 생긴다. 최동원은 2009년 7월4일 사직구장에 선다. 88년 트레이드 이후 21년만에 '배번 11번'이 박힌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시구에 나선다. 팬들은 돌아온 영웅에 많은 박수를 보냈다. 당시 그는 어떤 마음으로 마운드에 섰을까.
그들의 벌어진 골을 메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는 끝내 친정팀 롯데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지는 못했고 눈을 감았다. 롯데구단은 사직 야구장 박물관에 추모관을 마련하고, 최동원 데이와 명예감독, 영구결번 이야기까지 나온다. 친정 롯데의 최동원 껴안기는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고향 부산에서 자신의 후배들에게 열정적이면서 물러섬 없는 투구술을 제대로 전파할 시간을 부여받지 못했다. 하늘로 돌아가자 그의 빈자리가 유독 커보인다. 이제는 그가 그리워도 볼 수 없다. 최동원의 추억이 아련한 롯데팬들에게는 그게 더욱 아쉬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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