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가 돌아왔다. 다 낡아빠진 셔츠와 아무렇게나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은 잠시 버려두고 이번엔 멋진 외모의 스타 변호사가 됐다. 몸에 알맞게 피트 되는 정장을 입고 여배우와 연애하는 잘 나가는 도시 남성, 말 그대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영화 ‘두 번째 사랑’의 불법 체류자 지하부터 ‘비스티 보이즈’ 양아치 호스트 재현, ‘추격자’의 사이코 패스 지영민, ‘국가대표’ 입양인 차헌태 등 각기 다른 역할들로 끊임없이 변신을 꾀했던 하정우는 이번에도 새로운 인생을 산다. 전작의 모습들과 180도 달라져 있어 어색할 만도 한데 마치 ‘나만 배우’인양 돋보인다. 역시 하정우라는 찬사가 또 나올 정도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하정우를 만났다. 신작 영화 ‘의뢰인’으로 다시금 돌아온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실제 변호사 만났더니 의외로 코믹하던데?

변호사 역을 소화하고자 하정우는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황해’ 촬영이 끝나고 ‘의뢰인’ 크랭크인에 들어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남짓. 그동안 그는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실제 변호사를 만나는 등 연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완벽하게 섭렵하는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보고 50대 초반의 변호사 하는 분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처음 이미지는 점잖고 지루해 보였는데 시간 지날수록 굉장히 재밌는 면들이 부각되더군요. 검사 생활도 오래하고 해서 답답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성들이 보였습니다.”
이번 ‘의뢰인’을 촬영하며 그가 행했던 숨은 노력은 또 있다. 일 년 반가량 자신을 고립시켰던 ‘황해’ 구남 역을 벗어버리고자 촬영 기간 내내 수트만 입은 채 살았던 것.
“‘황해’가 프리 프로덕션까지 합치면 1년 반 이상 걸렸어요. 그 분위기와 무게감에 오랜 시간 고립돼 생활하다가 다시 뭔가 다운타운에서 생활하는 도시 남자로 바뀌려니 변환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첫 촬영 때 말 한 마디 띄기가 어려워서 애를 먹었을 정도지요. 그래서 의뢰인 촬영 기간에는 수트 입고 구두만 신었어요. 많이 발버둥 쳤습니다. ‘황해’ 때는 전날 술을 먹든, 눈이 충혈 되든 그것이 ‘간지’였는데 ‘의뢰인’은 한 시간씩 운동, 조깅하고 가야 했어요. 분장 팀에서도 20분간 마사지 해주고 외모적인 것들 바꾸게끔 애를 많이 써줬습니다.”
법정신이 많은 만큼 ‘의뢰인’ 속 주인공들의 대사 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 엄청난 대사를 외우느라 배우들 간 대화도 단절됐었다는 후문이다. 딱딱한 문어체의 말과 어려운 법정 용어도 하정우에게는 고민거리였다.
“‘황해’ 후반부부터 ‘의뢰인’ 대사를 읽으며 체화시키려 노력했어요. 따로 시간 내서 각색 작업도 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의 있습니다’란 대사 딱 두 장면만 나오는데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해야겠다 싶어 ‘잠깐만요’ 등으로 바꿨습니다. 또 어려운 법률 용어를 순화시켜서 한 부분도 많죠. 어떻게 하면 더 쉽게 할까 그 부분을 고민하고 수정했어요. 가랑비에 속옷 젓듯이 집중적으로 끝까지 끌고 가자 했던 거 같네요.”
처음부터 검사 역 박희순이 하길 바라

하정우는 가장 먼저 ‘의뢰인’ 출연을 결정짓고 다른 등장인물들의 캐스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변호사 역할, 거기다 제3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주인공을 연기한 건 그에게도 나름 새로운 도전이었다.
“변호사 역할이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캐릭터인데 이런 거 처음이기도 하고 그 전형성 안에 잠재력 많아 보였어요.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많았죠. 내심 상대역인 검사 안민호는 희순 형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캐스팅 작업 1년이나 걸렸어요. 박희순 씨 결정되고 그럼 한철민 역은 신인인가 했는데 장혁이 캐스팅 됐어요. (한다고 해서) 너무나 멋졌어요.”
현재 그는 ‘의뢰인’ 홍보 활동과 더불어 공효진과 신작 ‘러브픽션’을 촬영 중이다. ‘러브픽션’은 연애에 소심한 소설가(하정우)가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성(공효진)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물.
“‘러브픽션’ 촬영에 들어간 지 한 달 반 됐어요. 로맨틱 코미디고 지지리 궁상 삼류 소설가라 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말 이상하게 하든, 단어 좀 뭉뚱그리든 제약이 없으니까요.”
안방극장에 복귀해 팬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있다”는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물론 ‘좋은 작품’이란 단서를 달았지만.
“좋은 작품이 있다면 드라마 하고 싶어요. 아직 마음 움직일 만한 작품을 못 만났어요. 영화만 찍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작품 몰입해서 같이 해 나가는 것 좋아하는데 드라마는 연기만 하는 입장이라 좀 그렇긴 하지만요. ‘의뢰인’ 보며 드라마 ‘히트’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의뢰인’은 그에게 있어 많은 의미를 지닌 영화다. 배우로 거듭나는 시간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하정우는 영화와 극중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하며 유독 눈을 반짝였다.
“작품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황해’도 찍고 나서 제 연기를 돌아보게 됐죠. ‘의뢰인’의 경우 걸으면서 대사 치고 수월하겠구나 했더니 해야 할 게 의외로 너무 많았어요. ‘황해’가 체력적, 정신적 고립이었다면 이번엔 배우로서 끌고 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한편 '의뢰인'은 시체 없는 살인사건의 용의자(장혁)를 두고 벌이는 변호사(하정우)와 검사(박희순)의 치열한 반론과 공방을 그린 법정 스릴러물.
하정우, 박희순, 장혁 등 연기파 세 배우가 각각 변호사와 검사, 용의자로 분해 완벽한 삼각구도를 이뤄냈다. 오는 29일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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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