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데자뷰 기록을 통해 살아난 과거 기억들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1.09.27 08: 49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 웃음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쓰라린 광경. 이긴 팀의 미안 섞인 웃음과 진 팀의 허망한 웃음 안에 들어있는 당사자의 절망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였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황에 들어맞는 표현일 듯 싶다.
지난 9월 23일 대 두산(대전), 5-7로 뒤지던 9회말 2사 1, 2루 상황에서 1루 대주자로 나왔다가 후속타자 이대수의 좌익선상 2루타 때 홈 플레이트를 불과 몇 미터 앞에 두고 넘어지는 바람에 동점기회를 날리고 만 대주자 김준호(27. 한화)에 대한 단상이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 동시에 슬며시 떠오르는 또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MBC 청룡의 김우근.’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후기 2위 자리를 놓고 해태와의 치열한 종반 순위다툼이 한창이던 1987년 9월 29일, MBC가 청보와의 경기(인천)에서 3-3으로 맞서던 연장 10회초 2사 1, 2루 상황, 대주자로 1루에 내보낸 김우근이 신언호의 2루타 때 3루를 돌아 홈으로 뛰어들다 중간에 발이 꼬여 넘어지는 통에 결국 태그아웃 되며 중요한 길목의 1승을 날려야 했던 역사 속 한 장면의 바로 그 이름이었다.
그 해 MBC는 김우근의 ‘꽈당 주루사’ 이후 빙그레와 롯데 등에 경기를 거푸 내주며 후기리그 4위로 전락한 채 시즌을 접어야 했다.
벌어진 전개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기억나는 또 한 명의 1루 대주자로는 1993년 LG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의 윤찬(LG)도 있다.
2-3으로 뒤지던 9회말 LG는 선두타자 김영직이 우전안타를 치고 나가자 대주자 윤찬을 기용했는데, 윤찬이 대타 최훈재가 친 우익수 플라이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홈까지 그대로 내달렸다 횡사했던 일이다. 3루 주루코치의 동작을 '계속 달리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여 벌어진 일로 지금까지도 대주자의 악몽을 말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일화다.
그 해 LG 역시 비수로 돌아온 대주자의 폭주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무릎 꿇으며 한국시리즈 티켓을 삼성에 넘겨 주고 말았다.
지난 9월 18일에는 타자 쪽에서도 데자뷰 기록수립 장면이 한 차례 있었다.
KIA의 포수 차일목(30)이 LG를 홈으로 불러들인 광주경기에서 스코어 3-3이던 연장 11회말, 신인 임찬규(LG)의 초구를 그대로 걷어 올려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역시도 과거의 기억 속으로 팬들을 인도한 장면이었다.
프로야구가 닻을 올리던 1982년 원년 개막전(동대문구장)에서 MBC의 이종도가 이선희(삼성)를 상대로 연장 10회말 끝내기 만루홈런을 작렬시키던 그 때 그 시간 속 장면을 끌어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연장전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모두 4명. 원년 이종도를 시작으로 1998년 사직구장서의 조경환(롯데), 2001년 대구구장서의 강동우(삼성), 2002년 광주구장서의 홍세완(KIA)이 각각 극강의 희열을 맛본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조경환과 강동우에게 기념비적인 홈런을 얻어맞은 투수는 같은 인물로 LG의 신윤호가 그 주인공(?) 자격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날 차일목의 끝내기 만루홈런은 프로통산 15번째의 진기록인 동시에 연장전으로 범위를 좁힌다면 5번째에 해당되는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이었다.
한편 차일목의 진기록이 터진 다음날, 이번에는 투수 쪽에서 곧바로 일을 냈다. 19일 두산의 외국인 투수 페르난도 니에베(29)가 삼성전(대구) 연장 11회말 2사 2루에서 끝내기 폭투로 결승점을 헌납하며 프로통산 24번째, 연장전으로서는 14번째의 진기록이 탄생된 것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프로 최초의 끝내기 폭투는 삼성의 황규봉에 의해 작성되었다. 1982년 9월 4일, 대 롯데전(부산 구덕) 연장 10회말 1사 만루에서 던진 투구가 폭투가 되며 4-5로 패한 기억이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9월 17일 비록 퓨처스 리그(2군)였지만 한국프로야구 최초 퍼펙트게임의 대기록을 달성한 롯데 이용훈(34)의 이름도 끝내기 폭투를 저지른 범법자(?) 명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5년 7월 12일 LG전(잠실) 9회말 1사 2, 3루에서 폭투를 범해 팀을 수렁에 빠뜨린 황망한 전력을 갖고 있다.
최근 며칠 사이에 투,타,주 각 부문에서 연달아 발생한 진기록들은 이처럼 오랜 역사의 기억 속으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이러한 데자뷰성 기록들은 팬들의 야구에 대한 기억을 더욱 살찌우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풍성한 얘기꺼리들을 후대에 전하게 된다. 그 얘기들이 차일목처럼 좋은 내용이건 김준호처럼 당장은 아픈 내용이건 모두가 소중한 전설이 된다.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600만 관중시대를 연 2011 프로야구. 날마다 야구장을 찾아준 팬들의 발걸음마다 또 어떤 이야기가 우리 앞에 쓰여질 지에 대한 부푼 설레임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진정한 대기록 중의 대기록이 아닐까 싶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사진>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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