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신의 한 수'라는 말은 국내에 소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의 한 바둑 만화에서 유래했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바둑 기사가 추구하는 극의를 뜻하는 말이었던 '신의 한 수'는 우리 나라에서 이제 '정확하게 들어 맞는 묘책'이란 뜻으로 바뀌어 통용되고 있다.
26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2차전은 삼성 라이온즈의 2-1, 한 점차 승리로 끝났다. 점수만 보더라도 양 팀 사령탑의 두뇌 싸움이 치열하게 펼쳐 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날 1차전에서 삼성 류중일(48) 감독은 정규시즌 때의 마운드 운영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를 낚았다. 무실점투를 펼치던 선발 덕 매티스를 5회 과감히 내리고 차우찬을 투입한 모습에서 초보감독 답지 않은 노회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2차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류 감독은 과감한 투수 교체와 선수 기용으로 한 점차 접전의 승자가 됐다. '신의 한 수'가 원래 바둑에서 나온 말 처럼, 류 감독은 바둑 기사가 눈 앞의 상황 뿐 아니라 대국적으로 멀리 바라보고 '신의 네 수'를 던졌다. 그리고 류 감독이 둔 수는 적중해 승리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거기에 앞으로 남은 시리즈에서도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초석이 됐다.
▲6회 1사 2·3루, 권오준 카드 선택
5회까지 2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으로 완벽투를 펼치던 선발 장원삼은 6회 위기를 맞는다. 선두 박재상을 볼넷으로 내보낸데 이어 최정에 우익수 옆 2루타를 허용해 무사 2,3루가 됐다. 다음 타자인 좌타자 박정권을 투수 앞 땅볼로 잡아낸 장원삼이 마운드에서 내려간 뒤 류 감독이 선택한 카드는 권오준이었다.
다들 정인욱이나 정현욱 등의 카드를 생각하고 있을 때 권오준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삼성 타선이 침묵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올 시즌 완벽한 컨디션은 아니었던 권오준을 선택한 것은 자칫 도박으로 보였다.
하지만 권오준은 2005년과 2006년 모습 그대로였다. 첫 타자 안치용을 144km짜리 바깥쪽 직구로 삼진으로 돌려세운 권오준은 다음 타자 김강민과 풀카운트 접전 끝에 122km 서클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그리고 권오준은 예전 모습 그대로 마운드에서 어퍼컷을 하며 포효했다.
류 감독의 권오준 선택은 결국 대성공이었다. 큰 경기는 분위기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류 감독은 승부를 걸었고, 결국 실점 위기를 넘긴 삼성은 6회 반격에서 2점을 얻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권오준을 위기 상황에서 중용해 성공을 거둠으로써 앞으로 남은 한국시리즈에서 불펜진 가용 폭이 넓어지게 됐다.
▲놓지 않은 믿음…배영섭 선발 기용
지난달 21일 대구 두산전에서 배영섭은 김승회의 투구에 왼쪽 손등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다. 최소 4주의 진단을 받았기에 배영섭의 가을 잔치는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구단은 배영섭을 일본까지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하는 등 한국시리즈 엔트리 등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배영섭은 삼성의 물심양면 지원 속에 한국시리즈 직전 타격 훈련을 소화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일말의 불안감이 남은 상황에서 류 감독은 배영섭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전격 포함시킨데 이어 1차전과 2차전 모두 선발로 출전시켰다.
배영섭은 1차전에서 1안타로 타격감을 조율한 데 이어 2차전은 결승 2타점 적시타로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됐다. 배영섭은 박희수와 6구 까지 가는 승부 끝에 자세가 무너진 와중에도 절묘한 배트 컨트롤로 커브를 공략하는 데 성공, 2타점 중전 적시타를 작렬시켰다. 팽팽한 경기의 균형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결정타였다.
배영섭이 살아나며 류 감독은 톱타자 카드가 하나 늘어난 셈이 됐다. 1번 타자 김상수가 한국시리즈 들어 8타수 1안타로 부진한 가운데 여차하면 배영섭을 그 자리에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배영섭은 자신을 믿어 준 류 감독의 뚝심에 보답했다.

▲대수비 이영욱 투입, 한 점 지켜낸 특등사수
2-0으로 앞선 7회말 최형우가 타격을 끝내자 류 감독은 8회 좌익수 최형우를 빼고 이영욱을 투입했다. 이영욱은 중견수로 들어갔고 배영섭이 좌익수로 자리를 옮겼다.
바뀐 야수 앞에 공이 온다는 말은 외야수에게도 통했다. 8회 마운드에 오른 정현욱은 1실점을 하면서 무사에 주자 두 명을 남겨두고 마운드를 떠났다. 바로 투입된 오승환은 두 타자를 잘 처리했지만 최동수에 그만 중전 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2루 주자 최정이 2사 후였기에 일찍 스타트를 끊어 자칫 동점을 허용할 상황. 이때 이영욱은 홈으로 총알 같은 송구를 했고, 공은 포수 진갑용의 미트로 정확히 들어와 홈으로 들어오던 최정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올 시즌 불규칙한 출전 속에서도 7개의 보살을 기록한 이영욱의 강견이 빛났다.
류 감독의 한 수가 가장 빛난 순간은 바로 이영욱의 투입이었다. 배영섭은 오른쪽 어깨 수술 전력으로 인해 송구에 약점을 드러낸다. 만약 배영섭이 그대로 중견수 자리를 지켰다면 최정을 홈에서 잡아내기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 발 앞서 내다본 류 감독의 판단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류 감독은 "수비 강화를 위해 이영욱을 중견수로 냈는데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올 시즌 두 번째, 오승환의 2이닝 투구
올해 47세이브를 올린 '돌부처 오승환은 철저하게 관리를 받았다. 54경기 출전에서 소화한 이닝이 57이닝일 정도. 하지만 류 감독은 위기가 오자 서슴없이 8회 오승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오승환은 8회 무사 1,2루에서 마운드에 올라 1피안타 1탈삼진으로 실점하지 않고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9회에는 원래 하던대로 'KKK'쇼를 펼치며 2-1 승리를 지켜냈다.
올 시즌 오승환이 2이닝을 던진 경우는 단 한 번이다. 5월 25일 사직 롯데전에서 오승환은 3-3으로 맞선 11회 마운드에 올랐다. 이날 오승환은 피안타 없이 4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삼성에게 있어서 오승환은 마지막에 나오는 투수다. 그렇기에 오승환을 투입하는 타이밍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약 오승환이 틀어막는 데 실패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면 후폭풍이 거세다. 류 감독은 과감하게 오승환을 기용했고 승부에 쐐기를 박는 데 성공했다.
일각에서는 오승환의 체력 문제가 제기되지만 이날 오승환은 2이닝을 소화하며 투구수가 19개에 그쳐 큰 무리없이 경기를 마무리 했다. 결국 오승환은 등판 상황이 생긴다면 한국시리즈 3차전에도 정상적으로 출전할 수 있게 됐다. 명분과 실리 모두를 얻은 오승환의 8회 등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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