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변죽딴죽] “‘씨*’이 사투린줄 알았어요.”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있던 기사를 보면서 실소한 기억이 있다.
‘개**’만큼이나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욕설이 사투리로 알려졌다니...

네이버의 오픈사전에서 ‘존내’를 쳐보면 어원은 욕 ‘*나’인데 이제는 어원과는 다르게 ‘정말, 엄청, 많이, 너무’ 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몇 년후 손자에게 선물을 사주고는 “할아버지 존내 고맙습니다”는 답례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드라마 가 인기다.
“이방원은 이방원이고 이도는 이도이다”
그래서 지난주에 이도 세종은 똘복이에게 말했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독백으로 “나는 나의 길을 갈테니...”
드라마가 재밌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송중기가 세종인 시절 안타고니스트 이방원역의 백윤식은 아들인 송중기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아비가 아들목에...
그리고 그 아들 세종은 ‘살려달라’ 청원한다.
진행상 재빨리 죽은 이방원 대신 안타고니스트역을 ‘밀본’이란 정체불명의 조직이 대신한다. 드라마상 세종이 불운한 게 여기 있다. 정체불명의 ‘밀본’이란 조직도 노리고 지근거리를 허락한 ‘똘복’이도 노린다.
세종만 불운한게 아니다.
“정도전이 정말 밀본이란 조직을 만들었어요?” 묻는 고1짜리 내 아들도 불운하다.
참 드라마가 그럴싸해서 문제다.
세종조의 인물들이 망라된다. 정도전, 조말생, 성삼문, 박팽년 김종서... 역사를 따로 몰라도 세종조 당대의 인물들이 그럴듯하게 ‘밀본’을 얘기한다. ‘정말 있었나?’ 싶게.
세칭 ‘해찬들’이라 불리는 세대부터의 아이들은 국사가 선택인 시대를 살고있다.
안에선 허구헌날 지들끼리 패싸움 벌이고 밖의 힘센 놈들한텐 허구헌날 쥐어터진 우리 역사란게 아이들에게 매력적일순 없다. 당연히 국사를 선택하는 아이들은 나날이 그 수가 줄고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사를 모르는 아이들이 이렇게 멋지게 각색된 드라마를 보게되면 그것이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믿지않겠는가? 정도전 이방원 성삼문 정도의 이름은 풍월로라도 역사속 인물이라 들었을테니...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언제라도 아들 세종의 목숨조차 앗아갈 수 있는 냉혈한. 희대의 성군세종은 왕이 돼서도 아비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됐던 비루한 인간. 정도전은 신권정치에 목매 조선을 관통하도록 왕을 갈아치울수 있는 비밀결사 ‘밀본’을 만든 음험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드라마적 개연성상에선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설정이 자못 훌륭하게 드라마틱하다. 문제는...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역사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라는 거다.
사료에 충실했고 사료 행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대의 인간들을 구현해냈던 도 당시엔 역사왜곡논쟁에 휘말렸었다. 무수한 사료를 제시하며 작가가 임의로 역사를 재단하고있다고 성토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당시야말로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다’는 말이 처방전이 될 수 있었다. 그토록 사료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해설과 자막을 곁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요즘은 역사왜곡논쟁조차 없다. 더러 고증에 대한 질타가 있기도 하지만 찻잔속 태풍에 그치고 만다. 사극이라면 눈을 상큼 뜨고 예의주시하는 학계의 시선도 없다.
퓨전사극이 브라운관을 종횡한후 더 이상 사극에서의 역사적 근거는 무의미해졌다.
‘퓨전이라는데...’
사극을 쓰는 드라마작가나 연출자는 구애없이 윤색하고 상상력을 덧칠할 수 있다. 왜? 퓨전이니까...
갈등은 보다 첨예해지고 그 해소는 보다 극적일 수 있다.
그렇게 재미있는 역사드라마의 시대. 더 이상 “그렇게 역사를 왜곡하지 마시오!”란 일갈을 던지는 이조차 없는 시대. 국사를 선택해서야 겨우 배우는 이 시대의 아이들은 드라마속 세상을 통해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드라마 를 보면서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이다’고 목소리 높여야하는 아이러니가 답답하다.
[극작가, 방송 칼럼니스트]osensta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