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수괴 이완용은 늦깎이 ‘외국어고’ 우등생이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신간 에 따르면 이완용은 지금의 외국어고등하교에 해당하는 육영공원 첫해 입학생이었다. 이완용은 1886년 9월 육영공원(育英公院)이 개원할 당시 스물아홉 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좌원 학생으로 뽑혀 육영공원에서 수학했다. 미국인 원어민 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영어로 다른 교과목을 공부했다.
육영공원은 조선 조정이 특별히 초빙한 미국인 교사들을 통해, 영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과를 가르쳤던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프린스턴, 다트머스, 오벌린 등 미국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네이티브 스피커 교사 세 명이 조선의 선발된 엘리트 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 오늘 날 외국어고교와 비슷한 교육기관이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눠 입학생을 뽑았다. 좌원 학생은 과거에 급제한 초급 관리 중에서, 우원 학생은 아직 과거에 오르지 못한 젊은 선비들 가운데서 각각 선발, 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완용은 1882년 과거에 급제, 육영공원 좌원 입학 당시 관리신분이었다. 우원은 고위 관리들의 추천을 받은 15~20세의 양반 자제들이었다. 우원 학생들은 연령대로 보아서도 현행 고교생, 대학 초년생 청소년들이었다.
이완용은 입학 이듬해인 1887년 7월, 초대 주미(駐美) 조선공사관 참찬관(參贊官)으로 워싱턴에 부임하면서 육영공원 수학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 퇴학했다. 이 같은 이완용의 발탁은 “육영공원 학생 중 이완용의 영어 성적이 최상위층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참찬관 이완용, 2등 서기관 이하영, 3등 서기관 이상재, 번역관 이채연 등 초대 주미 공사관원 일행은, 미국 경험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미국통’ ‘친미 개화파’ 세력을 형성했다.
는 영어를 축으로 우리 근대사를 다층적으로 접근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반도에 영어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한반도에 처음 전해진 영어문장은 무엇이고, 영어를 처음 배운 사람은 누구이고, 첫 영어 통역사는 누구인지…. 영어, 영어 사용자, 영어 사용국과 조선, 한반도, 한국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최초의 미국시민권자 서재필, 최초의 이중 국적자 서광범, 최초의 영어연설자 이승만 등, 격랑의 우리 근대사 속 영어 또는 영어사용자들을 조명했다. 또 고종은 왜 영어 사용국 미국을 ‘짝사랑’했는지, 찹쌀떡 장수에서 외부대신에 오른 이하영 등 ‘세치 혀’만으로 출세한 이들의 이야기 등 영어를 둘러싼 에피소드들이 흥미진진하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조선인에 대한 교육목표를 ‘실무자 양성’에 두면서,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우리말 혹은 일본어로 가르치게 되면서, 영어 도입 초창기부터 고수했던 영어교육의 원칙이 무너진다.
나아가 일제하에선 양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시험이라는 객관성으로 포장된 잣대를 통과하면 관리로 갈 수 있는 길, 즉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 시험에서 변별력의 수단으로 영어가 사용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영어에 매달리게 되고, 일제하에서도 영어 열풍이 분다.
그러나 영어 시험은 영어를 일본어로 해석하고, 일본어를 영어로 작문 하는 등, 일본인에게 유리했다. 고급 관리 등이 되는 데 있어, 조선인은 극히 불리했다. 아마도 각종 시험에서 변별력의 수단으로 영어를 사용한 것은 이 처럼 일본인에게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저자의 추론이다.
이렇게 탄생된 시험영어는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고, 갈수록 새롭게 진화되어 거대한 산업을 이뤘고, 영어 본래 목적인 의사소통과는 점점 거리를 벌여왔다. 그래서 10년을 배워도 벙어리 영어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 됐다.
현직 기자인 저자는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라는 서문에서 “이 책은 영어를 축으로 한국해양사, 한-중-일 관계사, 한-미 외교사, 영어 교육사, 아니면 포괄적인 한국 근대사로 읽힐 수도 있다. 영어문제의 기원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두 권짜리인 이 책은 저자의 표현대로 ‘영어의 조선 상륙기’ 로 이 땅에 영어가 발을 들여놓게 된 개화기 이후의 영어 이식사이기도하다. 는 특히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심층 탐구로 공력을 쏟아낸, 여태껏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던 한반도의 영어 정착 과정을 속속들이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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