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야구가 보이네요. 그냥 야구가 하고 싶을 뿐이에요".
지난 13일 사직구장에서 벌어졌던 부산고와 경남고의 라이벌 빅매치. 그런데 부산고 4번 타자로 전광판에 낯익은 이름 '이승엽'이 찍혔다. 그렇지만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은 경북고 출신. 확인해 보니 두산에서 잠시 뛰었던 동명이인 이승엽(29)이었다. 이날 이승엽은 1회 경남고 선발 송승준에 중전안타를 뽑아내 선취 타점을 올렸다.
그로부터 열흘이 조금 더 지난 24일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 고양 원더스의 트라이아웃이 한창인 그 곳에서 이승엽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승엽은 김광수 전 두산 감독대행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스윙을 하고 있었다. 다시 야구를 시작하기 위해 내딛은 첫 발, 이승엽은 고양 원더스가 내민 손을 붙잡기 위해 연신 매섭게 방망이를 돌렸다. 유심히 지켜보던 김 전 대행이 이승엽에게 건넨 한 마디, 바로 "이제 정신 차렸나보네"였다.

부산고를 졸업한 이승엽은 2002년 신인선수 지명회의에서 2차 6번으로 두산에 선택됐다. 프로 문을 두드리는 대신 중앙대 진학을 선택한 이승엽은 대학 졸업 후 2006년 두산에 입단했다. 지명 당시에는 투수를 했으나 대학교 때 타자로 전향, 맞추는 능력이 뛰어나고 주루플레이에 능해 외야 유망주로 분류됐다. 포부를 품고 시작한 프로 생활이었지만 이승엽이 1군에서 남긴 성적은 11타수 무안타 1타점. 결국 2007년 두산에서 방출당한 이승엽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다 군 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단지 야구가 하고 싶어서 서른 살에 재도전의 길을 택했다.
김 전 대행이 이승엽에게 "정신 차렸냐"라고 말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김 전 대행은 두산 코치를 하고 있었기에 이승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야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잘 풀리지 않자 방황을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이승엽은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솔직히 대학교 졸업 때까지 야구를 쉽게만 했다. 그래서 프로에 대해 얕잡아 봤다. 근데 그게 아니더라"라고 말을 꺼냈다.
매스컴에서는 '홈런왕' 이승엽과 동명이인에 같은 좌타가 나타나자 관심을 보였으나 1군에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금방 관심을 끊었다. 동시에 이승엽도 야구에 관심을 잃었다. 그는 "야구가 안 풀리자 2군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돌아온 결과는 방출이라는 현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승엽은 쟁쟁한 선배·동기들과 함께 야구를 했다. 같은 1982년생인 추신수, 정근우(이상 부산고)와 한솥밥을 먹었고 이대호(경남고)와도 경쟁 관계였다. 하지만 부상으로 1년 유급을 해 동갑내기를 선배로 불러야 했다. 그때 가장 살갑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추신수라 한다. 이승엽은 "(추)신수가 나랑은 동갑이지만 학교에선 선배였다. 그런데 먼저 '학교 안에서는 선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밖에서는 친구처럼 지내자'고 다가와줬다"고 떠올리더니 "사실 야구를 하는 것도 추신수 아버님 덕분이다. 야구가 힘들어 가출한 적이 있었는데 추신수 아버님께 잡혀서 끌려가 다시 야구를 하게 됐다"며 웃었다.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와 선배들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가 됐다. 그렇지만 이승엽은 이제 그들을 부러워하기 보다 바로 눈앞에 다가온 꿈을 좇기로 했다. 그는 "야구가 안 될때는 그렇게 싫더니 이제 한 발 물러나니 야구가 보인다. 그냥 야구가 하고 싶다"면서 "꼭 테스트에 합격해 고양 원더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1군 무대에 재도전 해 보고 싶은게 꿈"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결국 이승엽은 이날 트라이아웃에서 합격점을 받아 꿈꾸던 야구를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야구는 서른 부터'라는 말이 있다. 내년이면 이승엽은 만 서른 살이 된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야구로 돌아온 이승엽의 내년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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