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변죽딴죽] 잘난척 좀 했다. 실력이 있으니까.
줄서기도 했다. 빽이 없으니까.
자존심은 포기못한다. 그거 빼면 남는게 없으니까.

조교수 한번 돼보자고 뺑이쳤는데... 다 가져서 잘난척도 줄서기도 필요없던 엄한 놈이, 스탠포드 붙어놓고도 짝사랑에 눈멀어 주저앉은 동기 놈이 낼름해버렸다. 여기엔 간쓸개 빼놓고 동앗줄인양 붙잡고 늘어졌던 학과장의 배신이 결정적이다.
실력있고 인간성 좋은 줄은 알겠지만, 그래서 스승으로 일말 존경도 했던 김상철(정진영)은 말끝마다 ‘인술’을 강조하며 벌레보듯한다. 교수자리 낚아채간 동기놈은 위계질서 운운하며 자존심을 긁는다. 후배놈들은 넌더리를 치던가 더 끔찍하게는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배겨낼 수 없다. 병원을 옯기자.
옮길 병원 분위기 파악차 잠입했는데 끌어주기로한 과장이 수술집도중 저혈당쇼크로 쓰러진다. 마침 그 대학병원엔 혈관모세포종인가 뭔가하는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의사는 없고...‘내가 하겠소’ 큰소리치고 본때를 보여주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담당환자 응급수술이 필요하단다.
빌어먹을이다.
눈앞에 있는 옮길 병원의 환자를 살리느냐. 집도하고 돌봐온 자기 환자를 살리느냐...
결국 둘 다 살리지만 환자를 두고 자리를 비운 도덕성이 문제가 됐다. 까짓 관둘 병원이다. 제 필요에 의해 구차하게 매달리는 학과장에게 시원하게 사직을 통보한다.
문제가 생겼다. 옮기기로 한 병원의 조교수자리가 그 대학 출신에게 넘어갔다. 여기엔 스승 김상철의 조언이 주효했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바람직한 의사가 되기엔 아직 미진하다”는...
왜 발목을 잡느냐 따지는 이강훈에게 김상철은 의사의 본분에 관해 훈시를 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란다. “초심요?” 콧방귀끼고 나서는 이강훈이다.
KBS 2TV 월화드라마 의 재미는 단연 이강훈 캐릭터에 쏠려있다.
시작부에선 젠체하는 졸부같은 캐릭터가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경멸스럽기까지 했지만 ‘개천표 용’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인간미의 아우라를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다. 때론 비열하고 때론 처절한 신하균의 연기력이 베이스가 됨은 물론이다.
의 이강훈에게서 춘추시대의 도적 도척(盜跖)이 비쳐진다.
장자를 보면 사람 간을 회쳐먹기로 악명높은 도적의 대명사 도척이 공자를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요임금은 자애심이 없는 인물이고 순임금은 불효자식이고 우임금은 반신불수가 되었고 문왕은 유폐당했다. 그런데 네놈은 이들의 덕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들도 이익과 욕심에 이끌려 본성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성정에 어긋난 짓을 범한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운가?“
도척이 보기에 요임금은 자신의 아들 단주 대신 순에게 왕위를 넘긴다. 아들에 대한 자애심이 없고 제 아들 귀히 여길줄 아는 인간의 본성을 어지럽힌 인물이다.
천하에 효자로 소문난 순임금은 그 아비 고수가 이복동생 상을 위해 죽이려고해도 간계로 벗어났으니 효자랍시고 생색만 잔뜩 낸 불효자요, 우임금은 치수한답시고 가정도 건사치못한데다 반신불수까지 됐으니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다.
도척의 인물평은 이어진다.
“현자라는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지만 묻어 주는 놈 하나 없고 포초(鮑焦)는 세상을 비난하다 나무를 껴안고 죽고 개자추(介子推)는 지극히 충성스러워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어 문공에게 주었으나 비참하게 불에 타 죽고 미생(未生)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가 오지 않아 기다리다가 홍수가 져서 물에 떠내려가 죽었으니 이들이 칼질을 당한 개나 홍수에 떠내려가는 돼지와 다를바가 무엇인가.
결국 명목에만 붙어서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본성으로 돌아가 몸을 보양할 줄을 몰라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셈이다. 이렇게 보면 어느 놈도 존경할게 없다. 네놈이 한 말이란 모두 내가 버린 것들이다. 당장 돌아가라!”
호통을 치니 춘추시대를 관통하여 최고의 말빨로 알려진 공자가 집비삼실(執轡三失), 말고삐를 세 번 잡았다 놓치고, 불능출기(不能出氣), 숨도 내쉬지 못할만큼 놀라 쫓겨왔다한다.
의사의 도리를 설하는 김상철에게 이강훈이 반문한다. “교수님은 오만했던 시절 없습니까?교수님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청렴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고.
그 대목에서 싸해지는 김상철의 표정은 도척의 호통에 놀라 집비삼실하고 불능출기한 공자를 보는 것 같다.
도대체 뭘 잘못했는가? 의사로서 환자를 잃길 했나? 선배로서 후배교육을 등한시했나? 후배로서 선배보필을 못했나? 그저 출세 좀 해보자는게, 실력에 걸맞는 대우 좀 제때 받아보자는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나도 잘해보자고 하고 있는데 왜 니들의 잣대로만 나를 평가하는가?
김상철에게까지 사직을 표명하고 나서는 길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는다.
젠장이다.
이강훈의 인생이 또 한번 꼬여서 최후의 보루인 자존심마저 던지고 병원에 잔류해야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학과장에게, 동기에게, 김상철에게. 그렇게 가장 증오하는 인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직을 철회해야될 판이다.
작가가 이강훈을 궁지로 몰아가는 솜씨가 빈틈없이 잔인하다. 예시된 복선들로 봐선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수술집도의가 김상철일 것이고 작가는 그런 김상철의 수술을 이강훈에게 맡기리라 예견된다.
결국 드라마는 이강훈이 제2의 김상철이 되는 것으로 결말짓겠지만 지금 현재는 있는 자, 힘센 자들이 구축한 세상의 논리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이강훈의 행보가 심금을 울린다. 그렇게 싸우느라 항상 붉은 기가 도는 배우 신하균의 눈매도 안쓰럽고...
그런 브라운관의 투사 이강훈을 위해 험프리 보가트의 심정으로 잔을 들고 싶다. “이강훈! 그대의 붉은 눈동자에 건배를!”
[극작가, 칼럼니스트]osensta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