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와 박찬호, 20년만에 이뤄진 인연
OSEN 이상학 기자
발행 2011.12.20 08: 39

지난 1991년 고교야구계에는 투수 3대 천왕이 있었다.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가 바로 그들이었다. 박찬호(38)의 이름은 없었다. 그저 공만 빠를 뿐 제구가 안돼 아직 다듬어야 할 것이 많은 투수로 평가절하됐다.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가 대학 및 프로에 스카우트될 때 박찬호도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의 입단제의를 받았다. 빙그레는 박찬호의 어린 시절 로망과 같은 팀이었다.
빙그레는 당시 김영덕 감독의 요청아래 박찬호를 잡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한화는 2000만원의 계약금을 박찬호에게 제시했다. 김영덕 감독의 권유에 박찬호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계약금이 너무 적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1000만원을 갖고 협상 줄다리기를 벌인 박찬호는 결국 한양대에 진학했다. 빙그레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대학에서 몇 년 더 다듬어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120만 달러에 입단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입단하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해 빙그레에서 한화로 팀명이 바뀐 이글스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박찬호는 1996년부터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돼 승승장구했다. 한화도 1999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일궈내며 만년 준우승팀의 설움을 떨쳤지만 오랜 기간 강팀으로 군림하지는 못했다.

한화와 박찬호는 먼곳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의 대형 투수가 되어있었고, 이후에도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입지가 탄탄했다. 감히 한화가 노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2007년부터 박찬호는 급격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국내 복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지난해 FA 신분으로 새소속팀을 찾지 못했던 박찬호는 한화의 하와이 전지훈련지에 합류, 선수단과 함께 훈련하며 안면을 익힌 바 있다.
우승반지를 바라보고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그러나 부진을 면치 못하며 시즌 중 웨이버 공시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팀을 옮겼다. 피츠버그에서 2승을 추가, 메이저리그 아시아 출신 최다승(124승)이라는 위업을 세웠다. 124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우승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일궜다.
메이저리그에서 목표를 달성한 박찬호는 올한해 일본프로야구에서 1년을 보냈다. 그리고 시즌 중 한국 복귀를 희망했다. 시즌 종료 후 오릭스에서 방출된 박찬호를 위해 한화 구단은 특별법을 추진했고,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통과시켰다. 박찬호는 복귀문을 열어준 한화에 고마움을 나타냈고, 연봉 백지위임으로 진정성을 나타냈다. 한화도 그런 그에게 독수리 날개를 달아줬다. 그것도 최저연봉 2400만원에 야구발전 기금 6억원이라는 명분과 실리의 모양새를 모두 갖췄다.
20년 전 한화는 단돈 1000만원 때문에 박찬호를 놓쳤다. 그 이후 무려 20년이 지난 뒤 마침내 박찬호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은 이제 내년 시즌 '한화 이글스 투수 박찬호'로 화려하게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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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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