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사에 이번처럼 풍성했던 스토브리그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2011년 겨울이 흐르고 있다.
SK 정대현과 이승호의 롯데행,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조인성의 SK 이적, 이택근의 친정팀 넥센으로의 복귀, 한화로 둥지를 옮긴 송신영 등등, FA 자격 취득 선수들의 잇따른 이적과 롯데 이대호의 일본 진출(오릭스), 그리고 해외파인 이승엽(삼성), 김태균, 박찬호(이상 한화)의 고국으로의 귀환 등,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스타급 선수들의 움직임을 쫓다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아홉 번째 신생구단 NC 다이노스(감독 김경문)와 독립구단으로 탄생한 고양 원더스(감독 김성근)의 창단과 선수수급까지 맞물려 그 어느 해보다도 분주한 선수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메가톤급 변화를 보고 있자니 문득 우리들의 별에서 이젠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장효조와 최동원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던 타자와 투수, 그러나 그들 역시 스토브리그를 뜨겁게 달궜던
이적경험을 나누어 가진 선수들이었다.
요란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장효조와 최동원은 삼성과 롯데의 간판이었다. 1982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서울) 우승을 함께 일구며 한 발 늦은 1983년 프로에 나란히 뛰어든 둘은 각자의 소속팀을 리그 정상(1984년 롯데 KS우승, 1985년 삼성 통합우승)으로 이끄는 등, 투타에 걸쳐 당대 최고의 활약을 펼쳐냈다.
타격의 천재로 불렸던 장효조는 1983년 데뷔 첫해부터 수위타자(.369) 자리를 꿰찬 것을 시작으로 1984~1987년 사이 타격왕 3연패를 이루는 등, 타격능력에 있어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구가했는데, 그가 이룬 통산타율 3할 3푼 1리는 아직까지도 가장 높은 자리에서 고고한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릴 때면 부적처럼 늘 따라붙는 기록얘기가 있다. 바로 1984년 삼성과 맞붙었던 한국시리즈에서의 4승 독식이다.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롯데가 삼성을 누르고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에는 최동원의 역할이 가장 컸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가 일군 4승이라는 숫자보다는 그 내용에 더욱 놀라게 된다.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모두 4차례(1, 3, 5, 7차전) 선발등판, 그 중 완봉승 1차례를 포함해 무려 4번의 완투를 기록했으며, 여기에 구원으로 나섰던 6차전까지를 더하면 열흘간(9월 30일~10월 9일) 모두 5경기에 등판(4승 1패)한 것으로, 투구회수만도 40이닝에 이를 만큼 엄청난 혹투였다.
아울러 무리한 등판으로 다음 시즌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지만, 이듬해인 1985년 최동원은 또다시 20승을 거두며 흔들림 없는 건재를 과시했다.
1984년 최동원이 정규리그에서 거둔 승수는 27승, 여기에 한국시리즈 4승을 더한 한 시즌 31승과 탈삼진 223개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대기록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1988년 겨울, 이들 둘의 인생여정에 한파가 몰아 닥친다. 선수협 설립에 관여한 여파로 팀을 등져야 하는 운명을 함께 맞이한 것이다. 롯데 최동원은 삼성으로(11월 22일), 삼성 장효조는 롯데로(12월 20일). 두 선수간의 맞 트레이드 형식은 아니었지만 불과 한달 남짓 기간에 둘의 운명은 또다시 어깨동무하며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반 타의에 의한 이적 후, 두 선수의 기량은 나이와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며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다. 반짝하는 모습을 잠시 보이기도 했지만 최동원은 1990년 통산 100승과 1000탈삼진 기록달성을, 장효조는 통산 1000안타 달성(1992년)을 마지막 선물로 받아 들고, 1990년과 1992년 각각 프로 8년의 정든 글러브와 프로 10년의 때묻은 방망이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두 선수가 리그 최우수선수에 등극한 회수도 닮아있다. 1984년에는 최동원이, 1987년에는 장효조가 각각 시즌 MVP 자리에 꼭 한 번씩 올라봤다. 은퇴 후 최동원은 한화에서, 장효조는 삼성에서 2군 감독까지만 해본 기억조차도 비슷하다.
1984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투수와 우익수 부문 수상자로 나란히 무대에 올랐던 두 사람. 덧붙여 1984년에는 최동원이(95%), 이듬해인 1985년에는 장효조가(93%) 골든글러브 최다득표율 선수의 영예를 안았던 이력까지도 뒤를 밟고 있다.
세월이 흘렀고 프로야구 30주년을 맞이한 2011년, 둘은 또 나란히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베스트 10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장효조는 외야수 부문 세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하며 단상에 올랐고, 자리가 하나뿐이었던 투수부문 최동원은 선동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득표순위 2위로 탈락해야 했다.
2011 올스타전(잠실) 레전드 시상식에 올라 건강하고 환한 웃음을 짓던 장효조는 그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9월 7일 오전,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보다 보름 전(8월 22일) 열린 2011 레전드 리매치 경남고와 군산상고의 경기에 너무도 수척해진 얼굴과 야윈 몸으로 모습을 드러낸 최동원을 정작 걱정하고 있던 차에 날아든 비보였다.
그렇게 장효조가 떠나고 불과 일주일만인 9월 14일 이른 새벽, 이번에는 장효조를 따라 최동원이 이승을 등졌다. 그렇게도 닮은 꼴 인생을 살던 두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도 서로 동반자가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2011 연말 여러 시상식에서 두 사람을 추억하고 기리기 위해 적지 않은 상을 수여했지만, 팬들 곁에 다신 돌아올 수 없는 두 사람을 회고할 방법은 그들이 남기고 간 기록들뿐이었다.
인생여정은 참 많이도 닮아있던 둘이었지만 대립적인 성격의 포지션과 소속팀이 서로 달랐기에 그라운드 안에서는 충돌해야 했던 적도 많았다. 투수 대 타자로서 최동원과 장효조는 어떤 모습들을 남겼을까?
스포츠 투아이(주)를 통해 입수한 투타 맞대결 성적표에 나타난 둘의 관계는 한마디로 천적이었다. 1983~1990년까지 8년간 두 선수가 투수와 타자로 맞선 타석은 총 76타석. 이중 볼넷 등을 제외한 70타수에서 장효조는 최동원을 상대로 홈런 1개를 포함, 27안타를 뽑아냈다. 타율로 환산하면 3할8푼6리의 고타율이다. 특히나 최동원이 은퇴하던 해인 1990년 장효조는 11타수 7안타를 때려낸 상 원수였다.
최동원의 프로통산 피안타율이 0.241였음을 감안하면 장효조로부터 꽤나 시달렸음을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1984년 롯데와 삼성간의 한국시리즈에서도 장효조는 최동원을 상대로 17타수 6안타(0.353)의 높은 타율을 유지했다. 반면 장효조 역시 최동원으로부터 총 10개의 삼진을 당하며 안될 때는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기록으로는 아옹다옹 서로를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쳤으면서도 이웃한 등 번호 10번(장효조)과 11번(최동원)처럼 참으로 비슷하고도 인접한 여정의 야구인생을 살다간 두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참 행복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