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만 3년’ 이원재, “부모님께 걱정 끼쳐서…"
OSEN 박현철 기자
발행 2011.12.23 06: 42

"감독님께서 급하게 생각지 말고 차근차근 재활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자 노력 중입니다“.
데뷔 후 체격이 부쩍 좋아지며 2년차 시즌 최고 152km의 직구를 자랑하던 유망주다. 그러나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에 이어 뼛조각 수술까지 받으면서 어느새 지난 3년을 재활로 일관해야 했다. 힘들어도 자주 웃던 그는 부모님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왈칵 차오른 눈물을 꾹 참았다. 두산 베어스 5년차 우완 이원재(23)의 이야기다.
중앙고를 졸업하고 2007년 2차 1순위로 두산 유니폼을 입은 이원재는 입단 동기 이용찬(장충고 졸), 임태훈(서울고 졸), 김강률(경기고 졸)과 함께 서울 지역 4대 우완으로 꼽혔던 유망주다. 190cm의 큰 신장에서 비롯된 높은 타점을 바탕으로 좋은 직구와 커브를 구사해 팀에서도 일찌감치 ‘선발형 유망주’로 점찍었던 바 있다. 2008년에는 5선발로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2009년 일본 미야자키 전지훈련 도중 귀국하며 이원재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팔꿈치 과사용 진단을 받으며 2009년 5월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던 이원재는 2010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서 선발로 나서 1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강판했다. 또다시 찾아온 팔꿈치 통증을 이기고 던졌으나 결과는 안 좋았다.
“팔꿈치 수술을 받고 나서 건강해도 통증이 오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경우인 줄 알고 팔이 빠져라 던졌어요. 그래도 다음에는 나아지겠지 해서. 그런데 알고보니 팔꿈치 뼈가 웃자라서 생긴 통증이더라고요”.
올해 자라난 팔꿈치 뼈를 깎고 또다시 재활에 열중한 이원재. 2군에서 못 던져서 1군에 못 오른 것이 아니라 고비마다 찾아온 부상과 수술로 3년을 보낸 만큼 선수 본인의 속은 오죽했겠는가. 그의 성장을 기대했던 팬들의 원성 뒤로 이원재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자 노력했다.
“입단 동기들도 다들 1군에서 활약하고 동갑내기 (안)규영이도 1군에서 후반기 기회를 얻으니 마음이 급해지더군요. 재활 기간이 길어지니 정말 뛰고 싶었어요.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캐치볼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혼자 재활한 것이 아니라 (이)재우 형이랑 같이 재활했다는 점이 다행이었어요”.
재활 선수의 훈련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 보는 이에게도 큰 부담이 되게 마련. 이원재는 그 힘든 과정을 직접 3년 간 겪어왔다. 그나마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녔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이원재는 1월 19일부터 미국 애리조나-일본 가고시마 전지훈련에 합류해 국내보다 따뜻한 곳에서 재활할 예정이다.
2군에서 재활 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던 김진욱 신임감독은 이원재에 대해 “충분히 좋은 직구를 가지고 있는데 무조건 더 빠른 공을 던지려고 하더라. 직구만이 아니라 정말 좋은 커브도 갖춘 투수인 만큼 앞으로 건강해졌을 때 직구만 고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건강하게 오래 뛸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원재에게 김 감독의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를 정말 많이 했습니다.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재활에 임하고자 노력했고요. ‘나는 어떻게든 잘 될 것이다’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내년 목표요? 그저 경기에 뛸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제가 힘든 것은 괜찮은데 부모님께서 너무 걱정을 많이 하셔서요. 그간 부모님이 하셨던 마음고생 모두 갚고 싶습니다”. 부모님의 이야기에 이원재의 눈은 절로 붉어졌다.
그의 등번호는 11번이다. 2000년대 들어 두산에서 11번을 달았던 투수들이 부상이 잦아 다른 이들이 꺼려하던 번호였다. 그러나 전신 OB 시절 11번을 달았던 계형철, 이광우 등은 큰 부상을 겪지 않고 오랫동안 좋은 활약을 펼치며 베어스 투수진에 힘을 보탰던 투수들이다. 3년 간 재활에 몰두하며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던 이원재는 과연 훗날 ‘두산 11번의 악령’을 끊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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