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으로 30살이 된 한국 프로야구가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팬들의 사랑으로부터 왔다.
올해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목표 관중수는 663만 명이었다.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순위싸움과 명승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팬들의 야구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며 목표로 했던 관중 수를 넘어 680만 관중을 돌파하는 쾌거를 세웠다. 여기에 포스트시즌 관중 수까지 모두 합치면 700만 명을 넘는다. 그 어느 때보다 잦은 장대비로 우천 연기를 겪는 과정에서 달성한 값진 기록이었다.
그 가운데 2011년 8월 18일은 팬과 프로야구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 하루였다. 인천 문학구장에서는 SK 김성근(69) 전 감독의 경질에 반발하는 팬들이 경기가 끝난 뒤 그라운드를 점령하고 유니폼 화형식을 벌였다. 또한 같은 시각 잠실에서는 연전연패와 감독의 팀 운영에 불만을 가진 LG 팬들이 정문 앞에서 청문회를 열어 박종훈(51) 전 감독을 성토했다.

▲ 김성근 떠난 문학, '불타는 그라운드'
SK 김성근 전 감독은 구단과 재계약 문제로 마찰을 빚어 오다 8월 17일 '시즌 종료 후 자진 사퇴'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에 SK 구단은 다음날인 18일 김 전 감독의 경질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만수(53) 2군 감독이 감독대행으로 수행하기로 했다.
이에 SK 팬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삼미-청보-태평양으로 이어지던 약체팀의 연고지였던 인천야구를 한국 프로야구의 정상으로 올려놓은 김 전 감독은 그를 따르는 열성팬들에겐 '메시아'와 같았다. 분노한 SK 팬들은 18일 삼성과의 경기 내내 침묵과 야유, 그리고 김 전 감독의 이름으로 일관했다. 일부 관중들은 그라운드로 유리병 등 자칫 흉기가 될 수 있는 이물질을 투척하는 아찔한 장면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날 경기가 0-2, SK의 패배로 끝나자 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외야 폴대 쪽 담을 타고 하나 둘 씩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내려오더니 경기장 경호 요원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관중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마운드로 이동해 유니폼 화형식을 치르며 김 전 감독의 경질에 항의했다. 또한 일부 팬들은 SK 덕아웃에 난입해 연습용 야구공을 가져가고 불펜 카트를 몰고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SK 구단과 팬들의 전쟁이 이어졌다. SK 팬들은 홈경기 때마다 김 전 감독의 경질을 항의하는 현수막을 준비해 와 내걸었다. 이를 막으려는 구단과 팬들의 숨바꼭질과 몸싸움이 경기 때마다 이어졌다. SK 주장 이호준은 선수단을 대표해 “선수들은 팬 응원에 힘을 내는데 지금은 의욕이 떨어진다”며 팬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해 논란이 증폭되기도 했다.

▲ 1위에서 5위로, 뿔난 LG팬들 청문회 열다
같은 날 LG 선수단은 경기가 끝난 뒤 한동안 대구 원정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유는 두산전에서 또 다시 3-5로 무기력하게 패배하자 이에 항의하는 팬들이 잠실구장 중앙 정문을 점거해 LG 박종훈 전 감독 및 선수단 청문회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LG는 시즌 초반 다시 한 번 ‘신바람’을 내며 공동 선두로 뛰어 올라 9년 만의 가을야구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하지만 7월 들어서 승리보다 패배가 많아지게 되었고 순위도 꾸준히 내려가 급기야 8월 1일에는 롯데에 4위 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팬들은 박 전 감독의 선수기용과 경기 운영에 불만을 터트렸고 결국 청문회를 열었다.
박 전 감독과 김기태 수석코치, 박용택 주장 등이 팬들 앞에서 나와 사과를 했지만 팬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일부 팬들은 박 전 감독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거친 욕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한 가운데 1000여명의 팬들은 자정이 가까워 져서야 겨우 해산하기 시작했다.
▲ 엇나간 팬심, 구단의 미숙한 대처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선수들이 땀을 쏟는 그라운드를 점령해 마운드에 불을 내고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음료수와 야구공을 약탈하는 일부 팬의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충분했다. SK를 사랑한다던 팬들이 불을 낸 마운드는 선수들의 투지가 녹아 있는 곳이고 약탈한 야구공 하나하나는 선수들의 땀방울이 담겨 있었다. SK를 강호로 올려놓은 김 전 감독의 사퇴, 그리고 구단의 불통에 항의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했지만 엇나간 표현에 그라운드는 멍들었고 SK 선수들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났다.
연전연패에 답답해진 팬들이 직접 감독과 선수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청문회를 연 일은 예전에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은 18일 이후에도 LG가 홈경기에서 패배하면 자연스럽게 중앙 정문을 막아섰다.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항의하는 ‘청문회’가 아니라 단순히 패배에 ‘화풀이’를 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홈경기마다 LG 선수들은 더욱 큰 부담을 안고 경기에 임했고 그 와중에 주장 박용택이 “부담된다”라고 한 말은 그대로 별명이 되어버렸다.
구단의 책임도 있었다. SK는 7월 말 공식 홈페이지의 개편 과정에서 자유 게시판인 ‘용틀임마당’을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명목상으로는 ‘SNS를 통해 새로운 소통을 하겠다’고 했지만 팬들은 구단에 목소리를 낼 곳을 잃고 말았다. 팬들은 이후 벌어진 김 전 감독 경질과 자유게시판 폐쇄를 같은 선상에 놓고 구단이 팬들의 입을 막았다고 주장했따. 결국 구단과 팬의 불통은 더 큰 오해와 감정의 골을 만들었다.
KBO 관계자는 당시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은 알 것 같다. 그만큼 애정이 크다는 방증이다”며 이해를 하면서도 “그러나 더 이상 문제가 커지지 않았으면 한다. 조금만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8월 18일 문학과 잠실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 프로야구는 팬과 구단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내년 700만 관중 시대를 열기 위해서 꼭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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