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정의 공감 TALK]‘나는 가수다’가 처음 등장했을 때 보여준 ‘아주 특별한 쇼’의 느낌을 생각한다면 평범해진 오늘날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가수’ 도 스스로 이런저런 변화를 시도하고는 있다. 그러나 위기는 ‘개그맨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순위발표를 하면서 한명씩 사라지게 한다’거나 하는 부차적인 변화로 극복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프로 가수들이 경연 서바이벌 쇼’라는 이 쇼의 컨셉을 되새겨보며 ‘기본’에 대해 점검하고 변화해야 할 때다.
◆ ‘그들만의 쇼’ -시청자 투표를 생각해야 할 때.
처음엔 시청자와 청중평가단의 순위가 그다지 어긋나지 않았다. 그러나 갈수록 그 차이가 커졌다. 청중평가단이 유난히 ‘막귀’를 모아놓아서 그런걸까? 아니다. 평가단은 일상을 벗어나 특별한 장소에 초청받아 특별한 쇼를 보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수학여행이나 콘서트에 서처럼 낯설고 특이한 경험을 하기 원하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시청자들이 이런 평가단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TV앞에서 귀를 쫑긋 세우며, 몸을 내던지고 감정을 유난히 자극하는 가수들의 특별한 공연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가수들의 부담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즐기기에는 주말밤 TV쇼는 버겁다. 그리고 ‘열창’과 요란한 편곡만이 훌륭한 노래가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 시청자들은 성장했다. 그런데 나가수는 여전히 감동을 강요하고 관객은 눈물흘린다. 시청자는 마치 모두가 열광하는 종교부흥회를 옆에서 바라보는 듯한 뜨악한 심정으로 예상가능한 뻔한 순위에 실망을 거듭한다. 애초에 이쇼가 ‘대중들이 프로를 심판한다’는 컨셉이었다면 시청자들을 더 이상 무력한 구경꾼으로만 만들지 말고 적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시청자 투표는 시청자를 적극적인 심판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이다. .
◆패자가 아닌 ‘승자’를 위한 쇼가 필요하다,
7위가 탈락하고 새 가수가 그 자리를 메운다는 아이디어는 기존의 서바이벌 쇼를 뒤집고, 매회 같은 수의 가수로 공연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적으로 나가수가 ‘승자’를 위한 쇼가 아니라 ‘패자’를 위한 쇼가 되버린 것이다.
어떤 서바이벌 쇼든 탈락자가 나오고 아쉬움을 낳지만 그게 용납이 되는 것은 시청자들과 프로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후의 승자’를 낳기 위함이다. 최선을 다해 경쟁자를 물리친 최후의 승자는 행복해지고 그걸 보는 시청자들도 같이 행복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가수에는 시청자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다. 기껏해야 ‘꼴지를 일곱 번 하지 않은 사람’을 낳는 것이 최후 목표?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아무리 서바이벌 쇼라지만 사람들은 ‘꼴지만 가려내는 ’잔인함만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꼴지만 부각되고 마치 부품 갈아끼우듯 새사람으로 대처하는 ‘패자를 위한 쇼’에는 생존의 논리는 있어도 ‘다른 사람과 행복을 공유하고 싶은’ 공감을 안겨주는 재미가 없다.
◆ ‘나가수’형 가수는 따로 없다
아마도 나가수의 가장 큰 문제는 가수 섭외일 것이다. 랭킹매기기에 거부감을 느끼는 가수들, 옥주현이나 적우가 등장했을 때 자격논란같은 것들은 한자리에서 경쟁을 하기에는 음악 성격이나 급이 다른 가수들을 모아놓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점점 ‘나가수’에 출연할 만한 가수의 풀이 제한되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명절 때 열렸던 ‘나는 트롯 가수다’나 ‘무한도전-나름 가수다’를 보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수들은 아직 많이 있고, 또 단지 ‘가창력’에 얽매이지 않아도 가수들을 어떻게 묶어서 내보내느냐에 따라 재미있는 쇼가 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기 시즌제를 도입해서 ‘트롯 가수’‘80/90년대 발라드 가수’‘헤비메탈/록 그룹’‘아이돌 출신’ 같은 시즌별 가수 경연을 펼친다면 참가하는 가수들의 부담감도 줄어들 수 있고, 기획 아이디어에 따라 전혀 의외의 인물과 승자를 이끌어내는 참신한 경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dalcomhan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