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이유로든 야구경기에서 주자들이 한 곳(루)으로 모이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석의 원리를 소재로 만든 코너를 보면, 같은 극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밀어내는 반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야구 주자들의 속성이 이와 비슷하다.
야구규칙 7.03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두 주자가 같은 루를 차지할 수는 없다. 볼 인플레이 중에 두 주자가 같은 루에 닿고 있다면, 그 루를 차지할 권리는 앞 주자에게 있으며 뒷 주자는 태그 당하면 아웃된다’ 라고.

이 규칙의 중심 내용은 한 루에는 한 명의 주자에게만 점유권이 인정되며, 그 점유권을 놓고 두 주자의 충돌이 일어났을 경우, 선행주자(홈으로부터 가까운 주자)의 점유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한다라는 것이다.
가령 주자 2, 3루때 3루주자가 홈으로 달려들다 타자의 스퀴즈 번트 실패로 다시 3루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2루주자도 3루로 달려오는 바람에 3루 위에 2명의 주자가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이 펼쳐졌다면, 이때 3루의 우선적 점유권은 선행주자인 3루주자에게 있다. 설령 2루주자가 3루주자보다 먼저 3루에 도착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3루의 정식 주인은 나중에 도착한 3루주자가 된다.
2006년 6월 8일 한화-SK전(대전)서는 이와 유사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었다. 4회말 1사 2, 3루 상황에서 한화 김민재의 투수 앞 땅볼 때 3루주자 이범호가 홈으로 뛰다 말고 3루로 돌아가는 바람에 이미 3루로 진루해 있던 2루주자 김수연과 한 루에 중첩되었던 사례다. 당시 SK는 점유권이 없는 후위주자 김수연부터 태그해 아웃을 인정받았고, 점유권을 갖고 있던 앞 주자 이범호는 이미 김수연이 3루에 서 있자 헷갈린 나머지 루를 떠났다가 역시 태그를 당해 두 주자가 모두 아웃되고 말았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번졌다. 무사 1,2루때 타자의 땅볼타구가 나온 상황에서 2루주자가 3루로 진루하지 않고 그대로 원래 서있던 2루를 지키고 있다가 2루로 달려온 1루주자와 중첩이 된 경우에도 선행주자인 2루주자의 점유권리를 인정해 1루주자를 아웃으로 판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궁금증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상황에선 선행주자의 루 점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2루에 두 명이 같이 서 있었다면 그 루의 주인은 후위주자인 1루주자가 된다. 야수가 두 주자에게 모두 태그를 했다면 3루로 가지 않은 원래의 2루주자가 아웃이다. 앞서 전제한 규칙 7.03과는 정반대의 결과다.
야구규칙에 관해 폭넓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답을 쉽게 내려줄 수 있는 성격의 질문일 수 있지만, 단편적인 답변이전에 왜 그러한 판정이 내려지는 지에 대한 적용원리를 살펴본다면 좀더 체계적으로 규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얘기를 풀어보도록 한다.
같은 루에 복수의 주자가 겹쳤을 경우, 선행주자에게 점유권이 인정된다고 해놓고, 질문에 나온 상황에서는 정작 후위주자에게 점유권이 인정된 판정의 속사정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에 관한 이해의 출발점은 먼저 태그상황과 포스상황에 대한 구별에서 시작된다. 간단히 두 상황의 구별법을 요약하자면, 태그상황은 주자가 루를 비워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말하고, 포스상황은 땅볼타구가 나왔을 때 다음 루를 향해 주자가 뛰어야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주자가 1루와 3루에 있다고 가정할 때, 3루주자는 태그상황의 주자 신분이 되고 1루주자는 포스상황의 주자 신분이 된다. 후속타자의 땅볼타구가 나왔을 경우 3루주자는 루에 그대로 서 있어도 되지만, 1루주자는 반드시 2루로 뛰어야만 한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앞서 말한 주자 중복 처리에 관한 규칙 7.03은 원칙적으로 태그상황에서 적용되고 있는 규칙이다. 주자 1루 때 타자가 3루타성 장타를 치고 3루까지 뛰었는데 1루주자가 홈으로 들어가지 않고 3루에 멈춰 섰다고 가정해보자. 3루에 주자 2명이 모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야수가 2명의 주자를 모두 일단 태그했다고 했을 때 아웃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하는 주자는 무작정 3루까지 달려온 타자주자가 된다.
1루주자라면 포스상태의 주자였는데 왜 그럴까? 물론 포스상태의 주자였지만 1루주자가 2루를 지나는 순간, 1루주자는 포스상태의 주자 신분에서 해방된다. 이는 다음 루 도착이 완료되었기 때문으로 1개 루보다 더 많은 진루를 노리게 되면 그 주자는 포스가 아니라 태그상황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부동산에서 말하는 이사의 개념으로 풀면 이해가 쉽다. 어느 주자가 살던 집에서 다음 앞집으로 일단 이사를 가면 그 집에서 눌러 살던, 더 멀리 있는 좋은 집을 향하건 그 선택은 자유다.
태그상황에서 한 루에 몰린 두 명의 주자 중에서 선행주자의 점유권부터 인정하는 이유는 집을 비워줄 의무가 없는 주자이기 때문이다. 뒷 주자는 당연히 앞 주자가 집을 비워야만 입주가 가능함에도, 계약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 주자가 아직 집을 비우지 않았는데 덜컥 이사를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를 빗대어보면 포스상황에서 타자의 땅볼타구 때 1루주자가 2루로 뛰어야 하는 강제 상황은 땅볼타구가 나온 순간, 1루주자는 집을 비우기로 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타자주자가 1루로 달려오고 있어 1루주자는 머물고 싶어도 더 이상 1루에 머물 수가 없다. 주자 1,2루에서 땅볼타구가 나왔을 때 선행주자인 2루주자가 2루에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루주자에게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 계약이 땅볼타구가 나온 순간 체결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후속타자의 땅볼타구가 아닌 상황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1루주자가 견제구에 걸려 1,2루 간을 왕복하다 야수의 실수로 2루까지 진루하는데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2루주자가 3루로 가지 않고 그대로 2루에 머물러 있었다면 규칙 7.03대로 1루주자가 아웃이 된다. 타구에 의해서가 아닌 견제구나 도루 등에 의한 주자의 움직임은 주자 위치에 상관없이 무조건 태그상황으로 해석된다. 선행주자가 후위주자에게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한 계약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타자가 주자가 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루상의 주자들은 집을 비워줄 필요가 전혀 없는데, 특정 주자가 집을 이탈해 다른 집을 기웃거리는 일은 법적으로 보호대상이 되질 못한다.
다소 헷갈릴 수도 있는 주자의 루 점유권에 관한 규칙은 암기보다도 이처럼 부동산 관계를 빗대어 유추해보면 그 적용관계를 좀더 원리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기초원리를 바탕으로 가상의 예 하나를 더 풀어보는 것으로 얘기를 맺도록 한다. 무사 주자 1,2루 상황(포스상황)에서 우중간 깊숙한 플라이 타구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2루주자는 3루로 가다가 타구가 외야수에게 잡힌 것으로 오판, 다시 2루로 되돌아왔고, 1루주자 역시 타구가 잡힐 것을 염려해 선뜻 달려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외야수가 놓친 것을 확인한 이후 천천히 2루로 걸어 들어갔다. 2루에 2명의 주자가 모인 것이다.
이를 지금까지 배운 원리로 판단을 내려보면, 외야수가 공을 놓친 순간 타자가 주자가 된 포스상황이기 때문에 당연 집을 비웠어야 할 2루주자는 2루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1루주자와 2루에서 겹쳤다면 1루라는 집을 비워주고 2루까지 진루한 1루주자에게 2루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따라서 태그 당하면 2루주자가 아웃이다. 2루에 도착한 순간 2루라는 새집의 주인이 된 1루주자는 집(2루)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태그 당해도 아웃될 염려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잠시 후 장타성 타구를 친 타자주자가 앞 주자들의 상황 살핌 없이 쪼르르 2루까지 달려와 2루에 무려 3명의 주자가 집결하는 장관(?)이 펼쳐졌다고 한다면? (물론 타자주자가 1루주자를 추월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루주자와 2루주자의 점유권 이해관계는 이미 따져본 바 대로 후위주자인 1루주자에게 새집(2루)의 점유권이 있다. 그렇다면 2루주자와의 첫 번째 이해관계에서 승소한 1루주자는 타자주자와의 점유권 분쟁에서도 마저 이길 수 있을까?
그렇다. 2루에 도착한 1루주자의 2루 점유권은 타자주자 역시 빼앗을 수가 없다. 타자주자가 안타 또는 야수실책으로 1루라는 새집을 얻은 것까지는 인정되지만, 포스상황에서 해제(2루 도착으로)된 1루주자가 2루라는 새집을 후위주자에게 비워주기로 약속을 한 사실이 전혀 없기 때문에 후위주자인 타자주자는 2루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황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2루까지 달려온 타자주자의 과실이다. 따라서 3각 관계의 최종승자는 1루주자가 된다.
다음은 수비측의 대처 방법. 한 루에 3명의 주자가 동시에 서 있었을 때, 수비수는 3명의 주자에게 모두 태그를 일단 해놓고 봐야 한다. 심판원에 의해 아웃으로 인정받은 둘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앞서 실례에서의 이범호처럼 헷갈려 하는 주자들이 긴가 민가 루를 벗어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면, 아웃으로 아직 인정되지 않은 남은 주자(2루에 진루했던 1루주자)까지 태그아웃 시킬 수 있는 횡재수가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한화 시절의 이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