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사에 흔히 비유되곤 하는 야구경기에서 기록적으로 가장 사람냄새를 짙게 풍기는 것을 하나 고르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희생타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팀에 도움을 가져다 주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희생플라이와 희생번트를 아우르는 말 ‘희생타’, 그 중에서도 희생번트는 숭고함의 백미다.
희생번트가 어떤 경우에 기록되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복잡한 상황이나 예외규정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아플 수 있지만, 규칙서에 올라있는 희생번트에 관한 설명의 핵심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번트행위로 주자를 진루시키고 자신은 아웃되었음에도 타자에게 희생번트의 기록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타자가 희생의 의도가 아닌, 자신도 살아야겠다라는 복선을 깔고 안타를 목적으로 기습적으로 번트공격을 시도했을 경우다. 타자의 번트가 희생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안타를 노린 것이었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전적으로 공식기록원의 몫이다.

그런데 타자가 분명 충분한 희생의도를 갖고 번트를 시도, 주자를 진루시키고 자신은 1루에 출루하지 못하고 아웃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게 희생번트의 기록이 인정되지 않는 때가 있다. 번트타구가 땅에 가라앉지 않고 공중에 떴을 경우에 발생 가능한 상황이다.
가령 무사 1루에서 타자의 희생번트 타구가 포수 뒤 파울지역으로 높이 솟아오른 상태로 날아간 것을 포수가 몸을 날려 직접 포구한 뒤, 1루주자가 리터치해 2루로 진루한 경우에는 타자에게 희생번트가 기록되지 않는다. 결과만 따져 타자의 희생의도가 분명한 번트타구를 이용해 주자가 진루한 것은 맞지만, 번트(bunt)라는 용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가 공을 일부러 짧게 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인 만큼 허공에 떠 야수에게 직접 잡힌 타구를 번트로 간주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타자에게 타수 1이 추가되는 것은 기본이며, 주자를 진루시켰을 때에 주어지는 진루타와 비슷한 결과를 불러왔지만, 팀 고과상 번트를 잘못 댄 것에 대한 책임까지 피해갈 수는 없다.
이번에는 주자를 3루에 놓고 같은 그림을 상상해보자. 타자가 스퀴즈번트를 시도했지만 번트타구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포수에게 파울플라이 상태로 잡힌 후, 3루주자가 홈이 비어있는 틈을 파고들어 리터치해 득점했다면 타자에게 역시 희생번트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같지만, 이번에는 3루주자가 플라이 타구를 이용해 득점에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어 희생번트가 아닌 희생플라이로 기록된다. 도출된 결과는 같지만 기록이 얼굴을 바꾼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실수할 수 있는 상황이 또 한가지 있다. 무사 1루에서 보내기번트를 시도한 타구가 내야에 높이 떴는데 이를 포수가 잡다가 놓쳤다고 가정해보자. 1루주자는 2루에, 타자주자는 1루에 출루했다고 할 때, 타자의 번트로 주자가 진루했지만 타자주자 출루와 1루주자의 진루기록은 포수 실책이 된다. 평범한 플라이타구를 바로 잡았다면 1루주자가 2루에 진루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반영한 결과다. 잘한 것이 없는 타자가 기록적으로 이득을 챙겨가는 일은 원천봉쇄다.
실제로 번트타구가 플라이로 돌변한 경우, 공격측으로서는 아주 위험천만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2009년 롯데와 SK의 사직경기에서는 타자의 번트 잘못으로 트리플 플레이(삼중살)가 나올 뻔한 적도 있었다. 롯데가 1-0으로 앞서던 3회말 무사 1,2루에서 박기혁(롯데)의 번트가 높이 떠오르자 SK 포수 정상호가 몸을 던져 잡아낸 뒤 1루로 송구했지만, 다행히 원바운드 포구로 인정되어 타자주자를 제외한 주자들의 진루가 그대로 유효처리 되었던 사례다.
당시 김성근(SK)감독은 노바운드 포구로 주장해 리터치를 하지 않고 다음 루에 진루한 주자들까지 모두 아웃이라며 어필, 처음에는 삼중살을 이끌어내는가 싶었지만 포수와 투수, 타자주자가 한데 엉키는 과정에서 원바운드 포구를 정확히 짚어낸 심판진의 4심 합의에 의해 삼중살 판정이 무효화 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번트 플라이타구라 하더라도 평범한 플라이가 아닌 야수가 잡아내기 어려운 플라이였다면, 그래서 잡다가 놓친 것이라면 이때는 타자에게 희생번트 기록을 부여한다. 번트타구가 뜬 사실 자체는 번트를 잘 댄 것이라 볼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야수실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번트로 주자를 진루시킨 것이므로 기록상 타자에게 불이익은 돌아가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무사 1루 상황에서 희생번트의 힘을 빌어 주자를 2루에 갖다 놓는 일이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가능득점 수치가 오히려 0.3~0.4점 정도 낮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미 통계학적으로 증명된 지 오래이다. 메이저리그의 한 경기당 희생번트 작전사용 평균수치가 0.3~0.5개의 범주 사이를 오가는 것과 비교해 한국프로야구의 경기 당 희생번트 사용 평균수치는 여전히 무척 높은 편이다.
지난해(2011년) 치른 532경기에서 기록된 희생번트 수는 총 782개. 한 경기당 평균 1.47개의 희생번트가 기록되었다는 말이다.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보내기 번트시도 수를 합치면 실상은 이보다도 더 높은 수치의 희생번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2008년 김경문(두산), 로이스터(롯데), 김인식(한화) 감독 등, 보내기 번트보다 선수에게 맡기는 작전을 주로 구사하던 감독들이 주류를 형성하던 시절, 한국프로야구의 경기 당 희생번트 수치는 0.97(521개)까지 낮아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2010년(733개) 이후 그 수치는 다시 급격한 증가세로 돌아선 상태다. 모험보다는 안정된 경기 운영을 선호하는 성향이 짙게 반영된 결과라 해석되지만, 희생번트와 강공이 벌이는 치열한 통계다툼에서 수치상 늘 앞서 있는 강공의 유리함이 정작 현실에서는 아직 희생번트 선호라는 정서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음은 희생번트라는 탈을 뒤집어 쓴 또 하나의 얼굴이 아닐는지.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