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후 스스로 부담을 갖고 나서기는 처음인 시즌이었다. 페이스 조절도 못했고 생각이 많아지니 결국에는 야구가 잘 안 되더라”.
부진과 부상이 잇달아 겹치며 1년 만에 팬들의 기대치가 급전직하한 왼손 투수. 기대가 컸던 만큼 팬들의 실망도 엄청났다. 해외 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못한 채 잔류군으로 훈련 중인 베테랑 좌완은 겸허하게, 그러나 결코 허술하지 않게 새 시즌을 준비했다. 이혜천(33. 두산 베어스)의 2012시즌 스프링캠프는 단순한 휴지기가 아니다.
1998년 전신 OB에 2차 2순위로 입단한 뒤 선발-계투를 오가는 마당쇠 노릇을 하다 2008시즌을 마치고 일본 야쿠르트로 이적해 2년을 뛰었던 이혜천은 지난해 1년 11억 원 계약을 체결하며 기대를 모았다. 그동안 단점으로 지적받던 제구 난조를 시범경기서 떨친 모습을 보여줘 두산이 염원하던 좌완 주축 선발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혜천의 지난해 성적은 32경기 1승 4패 1세이브 4홀드 평균자책점 6.35. 데뷔 첫 해인 1998년과 허리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려 보냈던 2007년을 제외하고 가장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설상가상 7월 하순에는 연습 도중 타구를 맞고 왼 손등이 골절되는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시즌 전 팬들의 기대 섞인 바람들은 비수 같은 비난으로 변모했다.
일찌감치 미국 애리조나 1차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된 이혜천은 현재 잔류군의 부산 전지훈련에 참가 중이다. 당초 일본 가고시마 2차 전지훈련 포함 가능성이 높았으나 좀 더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팀 내 방침으로 인해 이혜천은 결국 비시즌을 모두 국내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불펜 투구 한 턴 당 최대 120구를 던질 정도로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20일 120개의 공을 던졌다. 조만간 연습경기에도 등판할 수 있을 것 같고. 통증도 없고 생각보다 부상 부위나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 이혜천에게 부진과 부상이 겹쳤던 지난 시즌에 대해 물어보았다. 힘든 1년을 보낸 뒤 이혜천 특유의 활달함도 이전에 비해 조금 수그러든 것이 사실이었다.
“많이 아쉽기도 하고. 솔직히 지난해까지 프로 14년 동안 가장 힘든 한 해였다. 허리 수술로 아예 페넌트레이스 등판 기록이 없던 2007년보다 더 힘들었다. 일본에 다녀온 뒤 돌아온 팀에 큰 보탬이 되고 싶었는데 후배들에게조차 보탬이 되지 못했다. 구단에서도 내게 큰 배려를 해준 만큼 ‘무조건 잘해야 한다’라고 마음먹고 나섰는데 그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생각이 많아지면 야구가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정말 맞는 것 같더라”.
“돌아오니 타자들의 컨택 능력이 상향 평준화되서 놀라기도 했다”라고 이야기한 이혜천은 현재 몸 상태에 대해 묻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린 시점이었으나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은 더 높아진 듯 했다.
“몸 상태는 오히려 1년 전보다 좋은 것 같다. 아직 팔 상태는 더 끌어올려야 하지만. 그래도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훈련을 하면서도 ‘더 소화할 수 있다’라는 생각도 들고. 시범경기까지도 제 페이스에 맞게 순조롭게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외 전지훈련에 참여하지 못한 채 잔류군으로 비시즌을 보내고 있는 이혜천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2006시즌 이혜천은 해외 전지훈련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그해 선발진에서 32경기 8승 6패 1홀드 평균자책점 2.79(4위)를 기록했다. 10승 이상은 거두지 못했으나 계투 난조 등으로 인해 날려버린 승리도 많았던, 활약 내실 면에서는 굉장히 좋았던 시즌이었다.
“2006년 때의 기억을 자주 떠올리고 있다. 그 당시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해외 전지훈련을 갈 수 없어 국내에서만 훈련했다. 그럼에도 선발로서 꽤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류현진(한화)의 독주를 막을 대항마가 될 뻔 했지 뭐”.(웃음) 그 이야기와 함께 이혜천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프로 15년차 좌완 이혜천은 어느덧 투수진 맏형 급으로 올라섰다. 국내 투수들만으로 봐도 이혜천은 에이스 김선우에 이어 팔꿈치 수술 후 재활 중인 이재우와 함께 공동 넘버2 위치다. 그만큼 이혜천은 2012시즌에 자신의 야구인생을 모두 걸었다.
“내가 유망주도 아니고. 어느덧 프로 15년차가 되었다. 한 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뛰겠다. 올 시즌 팀에 보탬이 되고 좋은 성적을 올리는 데 내 야구인생을 모두 걸어보고 싶다”. 고향인 부산에서 이혜천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신을 담금질했다.
farinelli@osen.co.kr
두산 베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