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가 던진 공이 똑바로 온다. 스트라이크다. 치려는데 공이 '휙' 아래로 떨어진다. '된장, 속았다.'
그렇다. 야구의 아주 중요한 본질 중 하나가 '구라'다. 그런 것 같으면서 아니고, 아닌 것 같으면서 그렇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이론? 진실? 사실에 근거? 그런거 없다. 그냥 맘대로 짐작하고, 추정한다. 명심하시라. 구라다.
■ 정근우, 박찬호를 쓸까스르다
▲ 우리말 배우기
놀면 뭐하냐. 국어 공부 하나 하고 넘어가자.
쓸까스르다 : 남을 추겼다 낮췄다 비위들리게 놀리다. '시까스르다', '씻까스르다', '씨까스르다' 같은 지방말이 있다.
홍명희의 임꺽정(林巨正) 중에 "자꾸만 이죽거리며 쓸까스리기만 하니까 영신은 발끈하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쫌 꾸리한 말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은근히 한방 메긴다' 정도 되려나?
▲ 영웅이 돌아왔다
지난 3월 14일. 한미 FTA 발효 하루 전이었고, 고리원전 정전사고로 시끄러웠다. 화이트데이여서 남자들 지갑 털리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날 가장 관심을 끈 뉴스는 단연 박찬호의 국내 첫 등판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관점에서다.
인천 문학구장, 상대는 SK 와이번스였다.
그가 뜨자, 사람들도 떴다. 연습경기 임에도 관중이 수백명 몰리고, 취재진이 바글바글했다. 한대화 감독 "날씨 쌀쌀하고 기자들 많이 오니까 한국시리즈 하는 것 같네"라는 드립 신공으로 즐겁게 해줬다.
하지만 이 경기, 알다시피 영웅이 죽 쒔다. 3회를 못채웠고 5피안타, 4실점.
▲ 추워서 그랬다
사람들이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결론은 날씨였다. 그날 인천 기온은 영상 5도, 바람이 심해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공 던진 사람도, 이글스 사람들도 그랬다.
하다 못해 와이번스 감독도 그랬고, 영웅한테 안타 2개씩 친 타자도 비슷비슷한 말들을 했다.
"(찬호 형) 공 자체는 대단했어. 날씨가 추웠으니까 내가 쳤지..."
그럼 그렇지. 그가 누군데,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 아닌가.
상대편 투수는 안 추웠을까? 와이번스 선발 로페즈는 4이닝 2안타 무실점이었다.
나이도 꽤 됐던데(37살), 더운 나라(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이고...근데 걘 왜 잘 던졌지? 아마 특이 체질이겠지.
신경끄자. 어차피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니까.

▲ 3회 와이번스의 공격
이날 영웅의 기록, 스피드, 컨디션 등등 다 무시하자. 수 많은 데이터 중에 딱 하나만 보자.
와이번스의 3회 공격. 박찬호가 2점째를 잃고 계속된 1사 1루. 주자 정근우가 뛴다. 2루 도루다. 결과는 세이프.
정근우는 또 3루까지 간다. 몇몇 매체는 "정근우가 2루와 3루를 거푸 훔쳤다"고 전했는데, 아마 착오인듯 싶다. 3루 간 것을 두고 일부는 폭투, 일부는 패스트볼이라고 보도했다.
공식 기록원이 판단하지 않는, 연습경기라서 그런가?
여하튼 도루가 하나 있었다. 뭘까? 무슨 뜻일까?
이게 오늘의 질문이다.
▲ 우리가 몰랐던 그의 神功(신공)
우리 영웅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탁월한 주자 견제능력이다.
도루를 막는 것은 포수 힘이 반, 투수 힘이 반이다. 한다하는 포수도 투수의 퀵모션(미쿡 사람들은 Slide Step이라고 한다나) 느리면 손 쓸 방도가 없는 셈이다.
때문에 현대야구에서는 투수만의 도루 허용률을 따로 집계한다.
그는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허용이 84개, 막은 것은 64개. 무려 43.2%다.
절정이던 2000년 시즌(18승)에는 단 3개를 허용하고, 8개를 잡아냈다(포수 채드 크루터).
http://espn.go.com/mlb/player/stats/_/id/3029/chan-ho-park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고?
빅리그에서 주자 후덜거리게 하기로 유명한 투수 2명이 있다. 탐 글래빈과 앤디 페티트다.
글래빈은 통산 208개를 허용했고, 154개를 막았다. 42.5%.
앤디 페티트는 122개 내줬고, 53개를 저지했다. 44.5%.
우리의 박찬호, 얘들한테 견줘도 꿀릴 게 전혀 없다. 게다가 얘들 모두 좌완 아닌가. 뜨악.
그런데 박찬호가 2루 도루를 허용했다. 이건 뭘까?
▲ 와이번스 알고 뛰었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날 무지 추웠다. 한대화 감독이 "너무 추우니까 그만하자"고 해서 6회에 끝냈다.
왜? 선수들 다칠까봐.
그런데 정근우는 뛰었다. 당연히 슬라이딩도 했다.
슬라이딩, 그거 하는 사람은 아프다. 많이 하는 선수들 가슴팍, 엉덩이...찰과상, 타박상, 멍투성이다. 그냥 안아픈 척 할 뿐이다.
더구나 추운 날은 더 많이 아프다. 그리고 다칠 지도 모른다.
신참이 뛰었다면 '나 좀 봐주세요' 하는 애교라지만 정근우였다. 주루센스 세상이 다 아는데 굳이 정근우까지 나설 일이 대체 뭘까? 연습경기에서.
그날 와이번스는 박찬호의 퀵모션을 계속 체크하고 있었다. 결과 1초22까지 나왔다고 돼 있다. 1초22이면 엄청나다. 보통 1초3이면 충분하다는데 역시 박찬호다.
정리해 보자. 와이번스는 계속 박찬호의 퀵모션을 체크하고 있었다(이건 뭐 어느 팀이나 다 한다). 그래서 무척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근우에게 뛰게 했다. 날씨가 추워서 슬라이딩 하면 많이 아플텐데...
▲ 구라의 시작과 완성
자, 구라를 시작하자.
또 얘기하지만 사실 아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합리성을 가장한 짐작이다. 그냥 즐겨보시라.
정근우의 도루. 본인의 '단독 시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기 후 멘트가 있다.
"주루코치님이 과감하게 뛰어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주루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코치의 요구에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날 박찬호의 포수는 신경현이었다. 작년 도루저지율 2할 7리, 리그 최하위 수준이다. 목적이 신경현이었을 리 없다.
목적을 추론하기 앞서, 더 궁금한 것이 최초 작전의 입안(立案)부터 실행되는 과정이다.
도루가 일반적인 관념대로 사령탑 이만수 감독의 생각이고 사인일까? 아니라는 데, 내 돈 쬐금과 손모가지 때를 건다. (이거 중요하다)
이만수 감독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의 평생 야구 스타일과 풍모를 볼 때 이렇게 사사롭고, 작은 일을 착안하고 도모할 사람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문제는 정식으로 벤치에서 작전을 내고 어쩌고 하는 어려운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연습경기니까.
아마도 주루코치, 전력분석코치 등등 코칭스태프들과 몇몇 (정근우를 포함한) 고참선수들이 덕아웃 안에서 얘기하다가 '정근우 도루'라는 게 입안되고, 실행됐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한다.

▲ "형님 귀국 축하드려요"
우리의 영웅은 대륙에서 야구를 했다. 거기 무지 쎄다.
그런데 요즘 애들 거기 쫄지 않는다. WBC 때 이겨봤다.
"메이저리그? 뭐, 한번 해볼만하던데?" 대충 이런 거다.
정근우는 이날 경기 뒤에 이런 말을 했다. "찬호 형 퀵모션 굉장히 빨라서 타이밍 잡기 진짜 어려워요. 근데 오늘은 (주자에) 별로 신경을 안쓰시더라구요."
당연하지 누가 거기서 뛰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그렇게 추운 날, 연습경기에서, 정근우 쯤 되는 선수가.
이말 지극히 사실일 게다. 만약 박찬호가 계속 신경쓰고 있었다면 정근우 2루에 못 갔다.
근데 뛰었다. 왜? 안 쳐다보니까.
라스베가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대륙에서 야구한 우리 영웅, 어이 없었을 지 모른다.
근데 이게 와이번스의 독하디 독한 점이다. 철저하게 실전적이고, 철저하게 집요하다. 빈틈이 보이면 여지 없다.
조범현-김성근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숙성된 거다. 그들이 쎈 팀이 된 요인이다.
이거 주로 한국과 일본에 있다. ‘대륙의 야구’가 가장 겁내는 거다.
그 도루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거다. '형님, 우리도 야구 웬만큼 해요'.
조폭 영화 버전으로 하면 이쯤 된다.
정근우가 문 앞에 퍼런 칼 한 자루 놓고 간다.
"형님, 귀국 축하드려요"라고 쓸까스르면서.
백종인 (칼럼니스트) sirutani@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