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엄태웅, 이 남자가 영화 ‘건축학개론’을 통해 고단한 삶에 잊고 있었던 우리 가슴 속 깊이 잠들어 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깨웠다.
지금 나이가 20대 후반~50대인 사람이면 누구나 90년대에 첫사랑에 한 번쯤 빠져보지 않았을까. 엄태웅과 함께 했던 인터뷰 내내 90년대 했던 첫사랑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었다.
첫사랑의 정의를 분명하게 내릴 순 없지만 엄태웅은 첫사랑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1살에 첫사랑을 만나서 26살인가 27살 때까지 만났어요. 정말 좋은 친구였죠. 20대의 반을 넘게 만나면서 뭐든지 그 친구와 처음으로 해봤어요. 그 전에 연애를 했어도 난 그 친구가 첫사랑인걸 알아요. 첫사랑의 기준에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첫사랑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죠.”
엄태웅은 ‘건축학개론’에서 15년 만에 불쑥 찾아온 대학시절 첫사랑 서연(한가인 분)의 집을 짓는 건축가 승민으로 분한다. 승민은 서연과 함께 집을 완성해가는 동안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를 기억이 되살아나 새로운 감정을 쌓아가게 된다.
누구나 갖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참 설레게 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기에 그래서 첫사랑의 추억은 대부분 미화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 같다.
“처음이라는 게 잊을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요. 암만 다음에 누군가를 사랑해도 사람이 무뎌지는 게 있어서 내가 지금 누굴 만나는구나라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도 알잖아요. 처음에는 설레고 힘들고 방법을 모르니까 잊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첫사랑에게 바쳤던 90년대의 아이템들을 회상하는 엄태웅의 얼굴에는 그때의 설렘이 가득 묻어나 기자도 덩달아 추억에 젖어들며 삐삐와 CD플레이어, 테이프 얘기에 빠졌다.
“LP판들을 모아서 테이프에 녹음을 해 첫사랑에게 선물했어요. 그 당시에는 돈이 없기도 했지만 그런 선물들이 통하던 시절이었어요. 레코드 가게에 가서 유재하, 박학기, 변진섭, 다섯 손가락, 웸(Wham) 등 좋은 노래들을 녹음했죠. 제가 정말 노래 녹음할 때 간격을 딱딱 맞춰서 잘 했어요.”(웃음)
이처럼 가슴 설레게 하는 첫사랑을 그린 ‘건축학개론’은 요즘 장대한 스케일 속에서 싸우고 피 튀기는 영화들이 가득한 가운데 참 반가운 영화다. 각박한 세상에서 화려한 장면들로 시각적인 면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과거를 기억하며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영화가 필요할 때다.
“블록버스터가 주목받은 요즘에는 이런 영화를 만들기가 힘들고 만들 거라 생각을 안했죠. ‘건축학개론’은 누구나 꿈꾸고 누구나 공감하는 얘기잖아요. 그 얘기로 영화를 정말 잘 만든 것 같아요. 모르는 얘기가 아니라 소소하고 누구나 갖고 있는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내 감성을 깨웠죠. 정말 반가운 영화인 것 같아요.”
엄태웅이 ‘건축학개론’을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이후 최고의 멜로영화로 꼽는 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중고등학생들은 ‘건축학개론’을 보고 설레고 풋풋한 첫사랑보다는 수지와 이제훈이 더 눈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 첫사랑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 시절을 떠오를 때 애틋한 마음이 드는 대상이기에.
포근한 봄이 돌아왔다. 꽁꽁 숨겨져 있던 첫사랑을 고이 꺼내 우리의 감성을 따스하게 충전시킬 수 있는 ‘건축학개론’을 한 번 만나보는 건 어떨까.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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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