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이 오늘 23일로 딱 스무살을 맞았다.
앳된 스무살 청년 정현철이 양현석, 이주노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 1집 ‘난 알아요’를 세상에 내놓은지 딱 20년이 됐다.
‘난 알아요’는 발라드와 트로트가 주를 이루던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엎었고, ‘천재 뮤지션’ 서태지는 방송사 주도의 음반문화 산업을 아티스트 위주로 돌려놨다. 서태지의 어린 팬들은 능동적인 팬덤이란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며 이후 아이돌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가요계는 서태지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핫한 혁명가이며 그가 바꿔놓은 일련의 흐름들은 아직까지도 ING 진행형이다.
# 음악, 라디오에서 비디오로

서태지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제쳤다. 역동적인 제스처로 한국어 랩을 소화했고, 매 앨범마다 콘셉트를 달리 해 새로운 패션과 헤어스타일을 유행시켰다. 레게머리, 힙합바지, 상표를 떼지 않은 의상 등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감각적인 영상으로 채워진 뮤직비디오는 서태지 음악의 ‘핵심’이었다. 그는 이미지 노출도 적극적으로 조절했다. 앨범 준비 기간에는 방송 활동을 전면 중단하면서, 새 앨범, 첫 무대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매번 컴백 때마다 획기적인 음악과 콘셉트로 성공적으로 시선을 끌어모았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서태지는 80년대와 90년대를 구분 짓는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고 평했다. 그는 “서태지의 등장을 계기로 가요 산업이 라디오 중심에서 비디오 중심으로 넘어오게 돼, TV가 가요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됐다”면서 “이에 따라 이전 20~30대 중심의 가요 소비층에 10대가 무섭게 떠오르면서 이후 아이돌 산업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가 일궈놓은 랩, 힙합, 댄스 문화는 아직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나 강력해서 ‘듣는 음악이 모두 죽었다’는 부작용도 끊임 없이 제기된다. 하지만 그는 댄스음악이 가볍다는 편견도 일찍이 날려버렸다. 헤비메탈, 록, 갱스터 힙합, 국악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실험 정신은 아직까지도 전무후무하다고 평가 받는다. 김작가는 “서태지는 댄스 음악의 틀에 머무르지 않고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댄스 그룹 출신 가수가 뮤지션으로 변화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자리매김했다”고 평했다.
# 문화산업, 아티스트 중심으로

서태지는 가수의 위상도 크게 바꿔놓았다. 매니저의 시스템에 따라야 했던 당시 활동 방식을 거부하고 데뷔 3개월 만에 직접 요요기획을 설립한 것. 매니저가 가수를 키우는 것이 아닌, 가수가 매니저를 고용하는 최초의 사례였다.
문화평론가 탁현민은 이를 크게 주목하며 “기존 가수들은 아주 낮은 인세를 받으며 음반사에 '소속'돼 있었는데 서태지는 가수가 직접 회사를 차린 최초의 사례가 됐다. 현재 기획사의 첫 개념을 도입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서태지는 방송사에 치우쳐있던 파워도 일정 부분 아티스트로 당겨왔다. 그를 지상파 TV에 데뷔시킨 송창의 CJ E&M 방송사업부문 개발 센터장 (당시 MBC ‘특종! TV연예’ PD)의 인터뷰 요청도 거절하는 ‘고집’이 있었다. 송 센터장은 “1집으로 성공하고, 두 달 쯤 뒤에 인터뷰를 하겠다고 카메라 한 대 들고 작업실을 찾아갔다. 20년 전에는 PD면 나름대로 힘이 있었는데 절대로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는 “체면이 구겨져 많이 당황했다. 또 우리만의 인연이라는 게 있는데 절대 용납을 안 하더라. 이 친구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라고 생각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국 컴백시 최초 인터뷰로 타협점을 찾았다고 한다.
언론과 시민들의 의식도 크게 바뀌었다. 그는 ‘딴따라’였던 가수의 ‘신분’으로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데 성공했다.
방송사, 기획사와 스타간의 파워게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많은 톱스타들이 1인 기획사를 차려서 스스로 대표로 나섰으며, 방송사와 스타 간의 팽팽한 긴장 관계도 날로 더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상황. 탁현민은 “서태지의 행보는 음반사와 방송사 간의 공고한 시스템 안에서 아티스트 중심으로 산업을 바꾸고자 한 첫 시도로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 사회적 메시지, 대중음악 속으로

서태지가 음악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 건 획기적인 음악에 담아낸, 더 획기적인 가사 때문이었다. 1집 ‘난 알아요’와 2집 ‘하여가’로 사랑 노래에 집중하던 그는 1994년 3집에서 돌연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와 교육 제도를 비판한 ‘교실이데아’를 선보이며 문화대통령에 올라섰다. 열렬한 10대 팬덤을 얻은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가요계를 뛰어넘어 사회적인 공간으로 확장시켰는데, 특히 갑갑한 교육 현실을 직설적인 가사로 풀어낸 ‘교실 이데아’는 10대들의 울분을 주류 문화에 가장 녹여낸 케이스로 남아있다.
음악평론가 강태규는 “서태지는 단순히 음악이 음악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목소리를 드높이는데 성공한 유일한 뮤지션”이라면서 “단순히 음악적 성과가 아닌, 대중 음악이 사회적 파장을 완벽하게 주도해나간 사례”라고 평가했다.
탁현민도 “90년대 초 운동권 음악이 갑자기 몰락한 가운데, 서태지가 사회 의식이 담겨있는 메시지를 대중적인 음악 화법으로 히트시키는데 성공했다. 메시지를 담아서 주류 음악으로 성공시킨 전무후무한 케이스”라고 기억했다.
그의 가사에 푹 빠진 열렬한 팬덤은 표현의 자유를 적극 옹호,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도 폐지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영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사후 심의를 시행하고 있어 관련 잡음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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