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경주 인턴기자] 4월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날이었다. 봄이 찾아오는 초입이었지만 이를 시샘했는지 바람엔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쉽사리 따스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날씨였다.
밖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따뜻한 기운을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추운 날씨에 단단히 여몄던 옷을 어느새 내려놓고 있음을 발견해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려 25년 만에 출연한 영화의 제목과 그녀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배우 윤석화는 영화 '봄,눈'에서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암에 걸린 엄마 순옥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극중 우리네 엄마같은 포근한 역할을 맡아서 그런 것일까. 지난 27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석화는 정말 친엄마처럼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묘한 배우였다.

이번 영화 '봄,눈'은 지난 1987년 영화 '레테의 연가' 이후, 윤석화의 약 25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인 셈. '레테의 연가'는 작가 이문열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영화 '밤의 열기 속으로'로 데뷔한 장길수 감독이 당시 메가폰을 잡았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연극을 통해 꾸준히 연기 생활을 해오던 윤석화가 왜 '레테의 연가' 이후로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춨던 것일까. 윤석화는 그 영화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레테의 연가' 당시 제 목소리로 더빙을 못 했습니다. 그게 제 천추의 한이에요. 제 목소리로 더빙을 안했다는건 제 영화가 아닌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연극동네에서 살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처도 있었고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오면 했을겁니다. 그런데 아직 때가 아닌지 해야겠다는 확신을 들게끔 만든 시나리오가 없었어요. 한 2개 정도는 제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일정이 잘 맞지를 않더라고요(웃음)."
그리고 그녀는 자신처럼 나이가 지긋이 있는 배우들이 선뜻 나서서 할 만한 영화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시나리오를 고르고 연극에서만 활동을 하다보니 어느덧 나이가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영화가 흔치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지난 2010년,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도 흔하지 않은 중년층 이상의 영화라는 점이 어느정도 작용을 했을 듯싶다.

"한국영화가 많이 다양해지기는 했지만 거의 젊은 층이 볼 수 있는 영화인 것 같아요. 중년층 이상의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그런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영화들이 많지 않아 아쉽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저는 지나가는 할머니라도 좋고 가게를 하는 주인 역할이어도 좋습니다. 좋은 영화를 함께 만든다는 기쁨이 중요한거죠."
'봄,눈'. 제목만 들어서는 이 영화가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겠구나 도통 짐작을 할 수가 없다. '봄'이 들어가서 따뜻한 느낌의 영화라는 것은 알겠는데 또 '눈'은 뭔가. 아리송한 제목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 원래는 이 제목이 아니었다며 영화 타이틀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제는 '눈물이 아름다워'였습니다. 너무 좋았지만 제가 제목을 바꾸자고 이야기했어요. 영화를 보고 울어야 될 사람들이 제목에 '눈물'만 들어가면 '아, 저거 또 우는 영화야'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저는 눈물의 힘을 믿는 사람이거든요. 울면 정화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며 비방만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봄,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봄날은 가지만 새로운 봄날이 오기 때문에 눈물이 아름다워'. 이러한 함축된 의미도 있고 사실 봄에 눈이 내리는 것은 기적이잖아요. 그것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기적을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 '암'이라는 소재는 정말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소재이다. 아마 우리나라 드라마와 영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암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봄,눈'도 암에 걸린 엄마의 이야기다. 겉으로 봤을 땐 여타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다. '봄,눈'이 가진 차별점은 무엇인가. 바로 에필로그다.
"일단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너무 아름다웠어요. 정말 읽으면서 많이 울었죠. 사실 너무 뻔한 통속 이야기이긴 해요. 근래 암에 걸려서 죽는 얘기들이 많았잖아요. 우려가 들더라고요. 하지만 기존 이야기하고는 달리 살아있는 삶의 진실성들이 극 속에 있었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주인공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 났어요. 저도 '봄,눈' 시나리오를 보면서 주인공이 죽었을때 끝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야기가 또 있더라고요. 이 영화의 보석은 에필로그라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죽은 이후 그 엄마의 삶이 가족들에게 무엇을 남겨놨는가에 대한 에필로그 말이에요."
본인이 극중 엄마의 연기를 펼치면서 아마도 친어머니의 생각을 많이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생각을 참 많이 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극중 순옥처럼 자신의 삶의 흔적이 유산이 돼 가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저희 어머니는 암으로 4개월 선고를 받으시고 15년을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의사 선생님도 기적이라고 그러셨죠. 정말 이번 작품을 하면서 세상에 없는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한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저는 또 누군가의 엄마니까 극중 순옥처럼 소망을 남길 수 있는 엄마가 되야된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옥이는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가족이 그녀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고 그녀의 삶의 흔적이 유산이 돼 가족에게 새로운 봄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이 부럽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암에 걸린 환자 연기를 하다보니 그녀는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실제로 삭발투혼을 감행했다. 그녀가 연기를 위해 삭발을 한 것은 이번이 무려 세 번째. 그녀는 자발적으로 삭발을 하겠다고 나선 후 연기를 펼치던 날, 영화 연출을 맡은 김태균 감독이 펑펑 울었다고 촬영장 에피소드를 전해왔다. 우는 감독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고.
"힘들다면 힘들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결정일수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저는 배우니까요. 윤석화라는 악기로 다른 사람의 삶을 연주하는거라 생각하기 떄문에 악기의 조율이 필요하면 조율을 해야하잖아요. 필요로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대단히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감독님이 삭발 얘기는 못하셨는데 제가 자청해서 머리를 잘라야한다고 말했어요. 관객분들에게 영화의 진실성을 알리려면 배우 자신도 좀 더 리얼한 진실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감독님이 되게 고마워하셨는데 삭발하는 날 감독님이 우셨어요. 그걸 보고 저도 울고 다들 눈물바다가 됐죠(웃음)."
윤석화는 연기 뿐만 아니라 연극을 제작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연극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연극계를 체험하고 또 영국의 연극계를 체험한 그녀는 두 나라의 연극 체계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런던의 체계적인 시스템에 부럽다고 전했다.
"영국 사람들은 빈틈없이 일을 합니다. 연극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놀랐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만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제가 별로 할말이 없더라고요. 다들 너무 준비를 철저하게 잘해가지고 오니까요. '내가 동양인이라 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라고 할 정도로 말을 못했어요. 그런 점이 조금 부럽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이 많거든요(웃음)."
그럼 연기가 어려울까, 연출이 어려울까. 37년차 배우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나와 질문을 한 취재진을 되려 당황시켰다. 수많은 작품으로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그녀이지만 아직도 연기는 어렵단다.
"연기가 더 어려워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잘하겠다는 욕심과 소망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작품을 할 때마다 잘하게 해달라는 생각을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요. 혼자 꼭 기도를 하고 나갑니다. 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역할이 되달라 기도하는거죠.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진정성만 생각하고 모든 판단은 감독에게 맡기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신인이니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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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철 기자 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