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존재감이 배로 불어난 ‘지명타자’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2.03.30 10: 29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앞두고 배역상 주인공 역할로 결정된 배우가 촬영 시작일에 연락도 없이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부상을 당해 연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 해당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커다란 장애를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야구경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선수들이다. 그런데 당일 경기에 스타팅 멤버로 출장하는 것으로 통보된 특정 선수가 야구장에 늦게 나타난다거나, 연습 중 부상을 당해 경기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경우, 그 동안 프로야구는 상대팀의 양해를 얻어 다른 선수로 대치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오래 전, 배팅 오더에 이름이 올라있는 선수의 몸 상태가 나빠 경기에 뛰지 못할 것 같다라는 상대팀 감독의 사정설명을 받아들여 다른 선수로의 교체를 양해했는데, 나중에 경기가 연장전으로 접어들자 아파서 못 뛰겠다고 빠졌던 선수가 대타로 나오기 위해 대기타석에서 몸을 푼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선수가 나오기 전에 이닝이 끝나 문제가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의상 그 선수의 경기 투입은 경우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경기장에 없거나 도저히 뛸 수 없는 상태의 선수를 다른 선수로 바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도 다른 선수로 바꾸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2012년 시즌부터는 내부규정이 무척 강화되었다. 상대팀의 양해를 얻어 선수를 교체하던 수위를 규칙적으로 한참 높여 놓았다.
우선 경기시작 전 양해를 얻어 교체가 허락된 선수는 당일 경기에는 출장할 수 없도록 문서상으로 못을 박아 놓았다. 공식기록에서도 그 선수의 출장기록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연속경기출장 기록을 이어가고 있던 선수였다면, 그날로 기록은 중단되고 만다. 공식기록지 상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교체가 된 선수가 아니라 일종의 당일 경기에 한해 실격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2012 시범경기가 시작되고 지난 3월 20일 SK는 삼성 전(문학구장)에서 오더에 포수로 올라있던 6번타자 정상호가 훈련도중 발목을 삐어 경기에 뛰는 것이 어렵게 되자, 4번타순에 있던 지명타자 조인성을 포수로 바꾸고 타순을 대폭 조정하고자 기록실에 의사타진을 해온 일이 있었다.
과거 같으면 시범경기이고 웬만하면 그렇게 하라고 양해를 했을 법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유는 2012년도 규칙위원회의 결정사항 때문이었다. 지난 2월 규칙위원회는 전일 선발 예고된 투수나 오더에 올라있는 야수가 경기 당일 부상이나 지각 등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어 다른 선수로 교체가 허용된 경우, 해당 선수는 당일 경기에 선수로서 출장할 수 없도록 대못을 박아 놓았다. 물론 출장기록도 불인정이다.
이 규칙에 의거, SK는 플레이 볼이 선언된 후 곧바로 포수 정상호를 최경철로 교체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정상호는 경기가 시작되고 교체를 했기 때문에 한 경기의 출장기록은 인정(연속출장 기록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만일 플레이 볼 이전에 오더 상에서 선수가 바뀌었다고 한다면 정상호의 출장기록은 ‘0’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예들은 스타팅 멤버의 결장 후유증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겠지만, 만일 지명타자로 올라있는 선수가 지각이나 부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된다면, 이 경우는 실로 파장이 엄청나다.
상대 선발투수가 바뀌지 않는 한, 지명타자는 반드시 한 타석을 완료해야 한다라는 규칙이 있다. 따라서 시작단계의 결장이 인정되지 않는 지명타자가 경기에 나설 수 없다면, 해당 팀은 다른 선수로의 단순 교체가 아니라 그 경기에서는 지명타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지명타자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얘기는 곧 메이저리그의 내셔널리그처럼 투수가 타순(지명타자 자리)에 들어가서 타격까지 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20일 문학경기의 예를 보더라도 정상호가 지명타자로 올라있었다가 경기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당일 선발투수였던 로페즈가 6번타순의 지명타자 자리에 들어가 경기내내 타격을 해야한다.
예전에는 이 부분도 저간의 사정을 들어 다른 지명타자로 바꿔 줄 것을 상대팀에 요청하면, 양해하에 바뀐 선수가 대신 지명타자 자리로 들어가 경기를 치를 수도 있었다. 규칙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조치이나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 아군도 언젠가 그런 상황을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역지사지'로 교체를 양해해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2012 시즌부터는 그림의 떡이다.
1982 프로원년에 해태는 김성한이 투수로 등판하는 날이면 지명타자를 사용하지 않고 김성한 투수를 타순에 넣어 타격까지 병행하게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는 김성한이 투타에서 모두 발군의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였기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였다. 하지만 이는 특별한 경우이고, 현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가 타순에 들어가는 것은 해당 팀의 공격력이 엉망이 되고, 연쇄반응으로 승부에도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한 일이다.
오더 교환(경기개시 1시간 전) 후, 지명타자로 올라있는 선수는 행여 다칠세라 몸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작은 부상이야 첫 타석 한번만 손해 보면 된다 치지만, 큰 부상이나 지각사태는 팀을 비상시국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SK 정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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