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라운드의 지배자였다. 지금은 KIA 스카우트로 일하는 권윤민은 학창시절 이종범의 야구를 지켜보았다. 그는 "도대체 저렇게 야구를 하는 선수도 있구나. 그토록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처음보았다. 이종범 선배를 보면서 야구의 꿈을 키웠다"고 기억했다. 모든 야구팬들 뿐만 아니라 야구인들도 그의 야구에 경이적인 눈을 보였다.
이종범은 광주일고 1학년때부터 대학 감독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겨울이면 대학팀들이 따뜻한 광주에 내려와 전지훈련을 가졌다. 그 팀들과 연습경기를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자그마한 체격인데도 엄청난 주루 스피드, 빠른 스윙, 강한 어깨를 갖추었다. 프로 선수들보다 실력이 좋고 빠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종범은 광주일고에서 연세대, 고려대가 아닌 건국대에 입단했다. 물론 명문학교들은 모두 스카우트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건국대는 동료들 서 너명을 함께 받아주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들 생각 때문에 건국대행을 결정했다. 그는 대학 1학년 첫 경기에서 고려대 에이스 박동희를 만났다. 이종범은 "그때 연타석 홈런포를 때렸다"고 기억했다. 확연히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이었다.

바로 국가대표로 뽑혔고 졸업할 때까지 부동의 유격수였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노모 히데오를 상대하기도 했고 안타도 쳤다. 93년 입단한 이종범의 계약금은 7000만 원이었다. 당시로도 헐값이었다. 해태는 돈이 없는 구단이었다. 광주 물가를 적용하면서 7000만원의 계약금을 책정했다.
그러나 이종범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돈보다는 프로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는게 먼저였다. 우리나라에서 획을 그을 수 있는 선수의 꿈이 더욱 컸다. 과연 얼마나 할 것인가라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고 한대화, 이순철, 선동렬 선배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 틈에서 잘해야겠다는 각오도 남달랐다"고 설명했다.
프로 첫 해는 타율 2할8푼에 그쳤다. 적응기였다. 어떻게든 에러든 볼넷이든 살아나가려고 했고 무려 73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이순철 선배를 제치고 톱타자로 승격했다. 이순철 수석코치는 "나보다 훨씬 잘하는데 내가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발이 빠른 것에 자부심이 컸고 전반기를 마치면서 프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한 시즌을 마치면서 상대 투수들의 수도 읽히기 시작했다.
93년 한국시리즈는 신인 이종범에게 독무대였다. 삼성에게 1승1무2패로 몰리면서 위기감이 찾아왔다. 김응룡 감독은 이종범을 내세워 삼성의 배터리를 공략했고 역전 우승의 원동력이었다. 당시는 이종범도 사인을 내면 뛰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아 투수들의 폼을 뺏어가며 2루 도루를 했고 역발상으로 3루까지도 뛰었다. 김 감독은 이종범이 하고 싶은 야구를 펼치도록 배려했고 부담도 주지 않았다. 이종범의 발야구에 삼성은 무너졌고 내리 3연승을 거둔 해태는 7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종범은 타율 3할1푼(29타수9안타), 4타점, 7도루의 성적으로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절정기는 94년이었다. 타격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다. 196안타와 타율 3할9푼3리의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 84도루, 113득점까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4할도 칠 수 있었지만 늦여름 사흘 동안 설사가 문제였다. 쉬지 못하고 경기에 출장한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고 실패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그 때는 볼이 정지된 상태에서 때렸다. 스윙 스피드가 빨라 모든 볼을 내 몸에 최대한 붙여서 때릴 수 있었다. 어떤 볼도 칠 수 있었다 .경기당 거의 2안타 이상은 날렸다. 그 때 19홈런을 날렸는데 스윙스피드가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했다. 최고의 성적표를 받아 페넌트레이스 MVP를 수상했다
그는 84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마음만 먹었으면 100도루도 가능했다. 이종범은 "전반기를 마치면서 100도루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리를 하지 말라고 선배들들이 충고했다. 도루를 많이 하다보면 전력으로 뛰고 슬라이딩하니까 몸이 축난다는 말을 했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도루의 필수조건은 3S라고 정의했다. 즉, 스타트, 스피드, 슬라이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스타트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 투수의 버릇을 모두 간파하고 폼을 뺏어서 스타트를 잘해야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기의 주루플레이를 많이 했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한 루를 더 밟았다. 공격적인 주루플레이였다. 이종범이 그라운드를 지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요한 한 점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한 점은 팀에게는 승리를 상대에게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이종범은 야구를 잘하고 못하는 선수의 차이점을 이야기했다.
그는 "안타와 홈런만 잘친다고 해서 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진화된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잘하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 루상에서 득점을 연결시킬 수 있는 선수가 정말로 잘하는 선수이다. 나는 좌전안타 치고 2루까지 많이 달렸다. 안타치고 곧바로 2루까지 달리는 선수들은 이전에 없었다. 처음에는 미친놈 소리를 들었지만 발이 빠르고 경험이 생기니까 쉽게 되었다. 그만큼 안타를 쳤다고 해도 한 베이스를 더 가는게 중요하다. 반드시 2~3가지 플레이를 더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94시즌을 마치고 군입대해 96년 4월까지 마지막 방위로 복무했다. 지금 처럼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했으면 병역혜택을 받았겠지만 그때 프로선수들은 아마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94년에 이어 95년 해태는 우승을 못했다. 이종범이 반쪽만 출전하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이종범의 존재감은 96년 확연하게 드러났다.
당시 해태는 2월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개막이 되었지만 힘을 내지 못했고 최하위의 시련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종범이 방위소집해제하고 돌아오면서 팀이 달라졌다. 이대진과 함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날 이종범은 2안타를 쳤다. 그리고 맨앞에서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정규리그에서 현대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라운드를 지배하고 상대를 공략하는 무서운 사나이였다. 타율 3할3푼2리, 25홈런, 76타점, 57도루, 94득점. 종횡무진 누볐고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두 번째 우승컵에 입맞춤했다.
97년은 3할-30홈런-60도루의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겼다. 홈런치는 톱타자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타율 3할2푼4리, 30홈런, 74타점, 64도루, 112득점을 올렸다. 소방수 임창용까지 활약한 해태는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타이거즈의 르네상스였다. 이종범은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3홈런을 터트리며 4승1패 우승을 이끌었고 두 번째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다.
이제 이종범의 적수는 없었다. 김응룡은 "이종범을 20승 투수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내무대는 너무 좁았다. 프로 5년만에 해외진출을 성사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그것은 해태의 몰락을 예고한 것이었다. (中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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