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시즌 개막을 앞두고 언론과 야구관계자들이 예상한 한화 박찬호 투수의 대략적인 예상 가능승수는 7~8승을 전후로 모아져 있었다.
39살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와 2006년 7승(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을 끝으로, 2007~2010년까지 4년간 5개 팀을 전전(뉴욕 메츠-LA 다저스-필라델피아 필리스-뉴욕 양키스-피츠버그 파이어리츠)하며 고작 11승, 여기에 2011년 일본프로야구의 오릭스 버팔로스로 진출해서는 7경기에 출장해 평균자책점 4.29에 단 1승(5패)만을 거둔 노을 진 성적. 그리고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와 치른 두 번의 시범경기에서 박찬호가 받아 든 평균자책점 12.96(8.1이닝)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박찬호를 10승대 투수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다.
또한 한 언론사의 시범경기 개막 이전 설문조사에서도 박찬호의 최대 승수는 10승의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는데, 타자를 압도하지 못하는 직구와 밋밋해 보이는 변화구가 국내 타자들에게 난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기대치의 눈금은 좀더 아래쪽을 향하는 국면이었다.

게다가 개막 이후 3연패의 궁지에 몰린 팀을 구해내야 한다는 부담까지 떠 안은 상태에서 덜컥, 그것도 국내 최대 아담사이즈인 청주구장의 선발투수로 예고된 박찬호의 등판 예정소식은 그래서 더욱 암울하게 들렸다.
4월 12일 목요일, 청주구장 매표소에는 경기 시작 전 이미 전석이 매진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전날 두산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한 탓에 실망 매물(?)이 쏟아질 만도 했건만 ‘선발투수 박찬호’라는 눈앞의 현실은 팬들의 가슴을 또 한번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 그의 연습투구에도 커다란 환호성이 일었다. TV 화면에서나 보던 박찬호의 투구였다. 주심의 ‘플레이 볼’ 선언이 내려졌고 고국의 고향 땅에서 그는 두산의 이종욱을 상대로 긴장된 첫 투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쉽게도 스트레이트 볼넷. 마음먹은 대로 제구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1994년 4월 8일 박찬호(당시 LA 다저스)가 구원투수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처음 서던 날, 첫 상대 타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4번타자인 프레드 맥그리프였다. 꿈에 그리던 무대였으니 심정적으로 얼마나 떨렸을까? 그때도 볼넷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와 오릭스 버팔로스의 유니폼을 입고 일본 마운드에 처음 올랐던 2011년 4월 15일, 첫 상대는 라쿠텐 골든 이글스의 1번타자 마쓰이 가즈오. 박찬호는 시작부터 홈런을 얻어맞았고 그 경기의 패전투수가 되어야 했다. 어느 땅에서나 그의 시작은 순조롭지 못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타격솜씨 하나만큼은 타고 났다는 평을 듣는 두산의 3번타자 김현수의 타구가 우익수와 좌익수 쪽으로 날카롭게 뻗어나갔지만 두 번 모두 파울볼에 그친 것을 계기로 박찬호의 제구력은 급격히 자리를 잡아갔다. 파워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김동주(볼넷)와 최준석(유땅)의 큰 산을 넘으며 무실점으로 1회를 마친 박찬호의 투구는 이후 회가 거듭될수록 위압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절정은 3회 초. 고영민-이종욱-정수빈으로 이어지는 일명 ‘쌕쌕이 라인업’을 맞아 박찬호는 달랑 공 ‘3개’로 쓰리 아웃을 완성시켰다. 모두 초구를 공략했지만 하나같이 내야땅볼(박찬호는 이날 19명의 타자를 맞아 11개의 땅볼타구를 유도해냈다). 타자에게는 직구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홈 플레이트 부근에서 떨어지는 변화구를 섞어 던진 것이 주효한 것으로, 역대 36번째 1이닝 최소 투구수(타이기록)라는 진기록에 시작부터 그의 이름을 올렸다.
한화가 5-0으로 앞서던 7회초 1사 1, 2루에서 마운드를 송신영에게 넘기기까지 박찬호가 던진 공은 총 92개. 이날 박찬호의 최고 구속은 149km. 구원투수 송신영이 2루타를 맞아 그가 남겨놓고 내려간 주자들이 모두 홈을 밟는 통에 2실점이 기록되기는 했지만, 박찬호는 6.1이닝 동안(피안타4, 탈삼진5, 볼넷2)사실상 무실점의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선보이며 팀을 연패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혁혁한 전과를 이끌어냈다.
7회 초 마운드를 인계하고 내려가는 박찬호를 향해 청주구장에 운집한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전날 싸늘하기 짝이 없던 관중석에는 파도타기가 한참 동안 그칠 줄 몰랐다.
경기가 끝났을 때의 스코어는 8-2. 한화의 시즌 첫 승이자 박찬호의 국내무대 첫 승이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에 빛나는 찬란한 훈장, 그리고 지난해인 2011년 4월 22일 일본에서의 첫 승이자 마지막 승이었던 1승을 더한 개인 프로통산 126번째의 승리였다. 한,미,일 메이저 무대에서 모두 승리투수를 기록한 투수로 역사에 새겨진 박찬호. 경기가 끝나고 보도기사에는 박찬호의 10승에 청신호가 켜졌다라는 문구가 딸려 올라왔다. 타선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얻은 승리가 아닌, 스스로의 기량과 구위로 따낸 승리였기에 기대치가 급상승한 것은 당연했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선수는 기록으로 말하고 기록으로 평가 받는다. 팀에 있어 박찬호는 그저 많은 투수들 중의 한 명일뿐이고, 우승이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팀의 일원일 뿐이다. 그러나 지극히 박찬호 개인만으로 시야를 좁혀본다면 박찬호의 첫 승은 물론, 앞으로 그가 일궈낼 기록의 숫자들이 알차건 부실하건 ‘박찬호’라는 투수를 표현하고 대신하기에는 어딘가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고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며 공장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한 대량 해고와 실직으로 사람들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갔고 2000년 8월 IMF 체제에서 벗어나기까지 가족들의 삶은 오랜 기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 시기에 야구팬은 물론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선수가 바로 박찬호였다. 그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LA 다저스 소속으로 매년 15승 안팎을 거두며 상처받은 고국 국민들 마음 속에 아침마다 위안과 용기와 희망을 선물해 주곤 했었다.
야구의 최고봉을 자처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정상급의 활약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이룬 박찬호가 선수로서는 노년기라 할 수 있는 40세 언저리에 연봉의 많고 적음 따위와는 상관없이 한국 마운드에 서고자 했던 그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가 지금 도전하고 있는 것은 그저 몇 승, 방어율 얼마라는 기록의 수치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이뤄낸 박찬호의 위업에 그간 성원과 찬사의 박수를 보내주었던 고국 팬들에게 선수로서 기량이 남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속뜻이 담겨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부담감을 버려도 된다”라는 김인식 감독의 말 속에는 정신적인 부담을 이겨내라는 뜻도 있지만, 그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이나 기록에 관한 성패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도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지금 박찬호가 도전하고 있는 야구는 그간 외국무대에서 해왔던 기록으로 평가 받던 야구경기와는 다른, 기록에 얽매이지 않는 그 이상을 추구하고 있는 야구가 아닐까 싶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