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영화 속에서 질투와 열등감 그리고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내뿜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라고 나즈막하게 인사를 건네온 배우 김무열은 영화 '은교' 속 극중 인물인 서지우가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순한 청년이었다.
극중 서지우는 손에 닿지 않는 스승인 위대한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의 재능을 갈망하는 패기 넘치는 소설가. 자신과 스승 사이에 느닷없이 들어와 자신이 갖지 못했던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은교(김고은 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워낙에 여러 감정들이 많다보니 연기하기에도 어려웠을터. 김무열 자신도 서지우 연기를 하면서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김무열은 왜 이 작품을 선택했던 것일까.
지난 19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OSEN과 만난 김무열은 '은교'의 메가폰을 잡은 정지우 감독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지우 감독의 연출작 '해피엔드'를 보고 대단한 팬이 됐다고.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컸고 영화 '해피엔드'를 봤을때 팬이 됐었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은교' 연출을 하신다고 했을때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죠. 또 영화가 하고 싶기도 했었어요. 그리고 촬영 내내 '내가 이 영화를 하길 잘했구나, 감독님이랑 하길 너무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마지막 촬영을 할 때 까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은교'의 첫 공개 이후 평단에선 연일 김무열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정말 말 그대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까지 소화해내면서 전작 '최종병기 활' 속의 모습보다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 그가 이처럼 감정연기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은교'의 원작자 박범신 작가가 그에게 건넨 한 마디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가 영화 속에서 소설가잖아요. 제 주위엔 어머니 빼고 문인들은 아무도 없거든요. 어머니도 사실 저에겐 문인이라기보단 어머니죠. 그래서 걱정이 많았어요. 스승의 재능을 질투하고 사랑하고 여고생과 사랑을 나누게 되고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인물. 너무 어렵잖아요. 그런데 박범신 작가님이 한 말씀 해주시더라고요. '예인들의 마음엔 모두 서지우가 있다'고요. 정말 많은 힌트가 됐어요. 서지우라는 인물의 감정은 모두가 겪은 과정이고 겪고 있는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저 자체도 열등감이 많아서요 그런 것도 도움이 됐죠(웃음). 선생님 말씀 한마디가 저에게 쉽게 다가왔어요."

김무열의 어머니는 소설가 박민형씨이다. 김무열은 극중 소설가 역할을 맡아 어머니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어머니의 어떤 면을 보고 그는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일까.
"어머니는 보조 작가분과 왔다 갔다 하시면서 둘만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세요. 멀리서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둘 사이에 오묘한 감정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죠. 짜증이 섞여있으면서도 웃고있고 서로 좋아하고 있는거 같으면서도 싸우고 말이에요(웃음). 어머니를 보면서 순수문학에 대한 동경도 생기게 됐고 배우게 됐고 어머니가 소녀적인 감성과 열정을 가진 채 살고 계신 것도 부럽기도 해요. 젊은 제가 그렇게 살아야하는데(웃음). 가끔은 무모할때도 있으셔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요. 정말 많이 배웠죠."
'은교'는 연일 출연 배우들의 노출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극중 박해일의 성기 노출과 김고은의 음모 노출은 대중의 관심을 끌며 한 온라인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기까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노출에 집중하다간 '영화의 맛'을 놓칠 수 있다. 시인의 욕망을 다루다보니 영화 속엔 마음을 울리는 시 한 구절, 한 구절이 도처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마 배우들도 촬영을 하면서 시에 매력에 빠지지 않았을까.
"어렸을때 시를 많이 읽었어요.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시를 써서 보낸 기억도 떠오르더라고요(웃음). 시를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어요. 시라는게 그냥 읽으면 하루에 한 권을 읽는데 하루에 한 편보고 느껴지는게 있고 음미하고 즐기고 그건 순전히 저만의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 시간, 느낌이 너무 좋더라고요. 오늘도 정지우 감독님께 시 한편을 문자로 보냈어요(웃음)."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순수문학을 동경하게 됐다는 김무열.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도 해 '참으로 감성적인 사람이구나'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자기 자신도 감성적인 사람이라며 배우에게는 '감성'이란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전했다.
"저는 원래 감성적인 성격이에요. 배우로서 감성적인 부분을 중요시여기죠. 원체 영화를 보면서 잘 울어요. 해일 형님의 연기를 보면서도 운 적이 있어요. 영화 '심장이 뛴다'에서 해일 형님의 대사 한마디에 펑펑 울었었죠(웃음)."
박해일의 대사 한 마디에 펑펑 울었다는 김무열. 그는 전작 '최종병기 활'에 이어 박해일과 또 한 번 호흡을 맞추게 됐다. 그만큼 오랜 시간 박해일을 옆에서 지켜봐왔을텐데. 그가 본 박해일은 어떤 사람일까.
"해일이 형은 배우로서 놀라운 사람이에요. 저랑 5살 차이 밖에 안나는데 높게 보이는 산이고 높게 보이는 벽이죠. 매 작품을 볼 때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하신 것 같아요. 외모 또한 애 아빠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고요(웃음). 어떨 땐 아저씨스러운 유들유들함도 있고 어떨 땐 현장을 지휘하는 사령관 역할 톡톡히 하실 때도 있고 사려깊고 배려깊으시기도 해요. 본인이 열 시간 분장을 하고 와서 다른 배우들, 스태프들을 챙겨주시고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카메라 앞에서의 배우 모습과 밖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됐어요. 두 작품 내내 해일이 형님께 많이 배웠죠."

그렇담 김무열이 보는 신예 김고은은 어떨까. 김고은은 이번 작품을 통해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파격 노출을 감행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김무열은 어려운 결정이었을텐데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어려운 결정이었는데도 결정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을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해냈고요. 현장에서도 첫 작품이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몰입도, 흡입력이 엄청 나더라고요. 특히 가장 놀라웠던 건 친화력이에요. 현장을 자기 집처럼 누비고 다니더라고요(웃음). 나중엔 '내가 김고은 영화 찍는데 놀러와 있는 것 같은데'라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고은이가 현장에서 자다 일어나서 '오빠 왔어요' 하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고요(웃음)."
김무열은 팬들과 함께하는 '은교' 쇼케이스에서 깜짝 식스팩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공개 이유는 배우 차인표 때문이라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던 것일까.
"살과 근육을 빼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던게 처음엔 비대하고 지방질이 많은 서지우를 생각했는데 집안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비대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근육을 뺐어요. 식스팩을 공개한건 영화가 끝나서 다시 만든 거 였죠. 사실 그때 차인표 선배님이 나오셨던 '힐링캠프'를 보고 감성이 충만한 상태였어요. 많은 분들이 쇼케이스에 찾아와주셨는데 '복근이 대수냐' 이런 생각이 들었죠. 정말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려요. 개인적으로 운동을 좋아해요. 어렸을때는 시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가기도 했었고요. 농구도 좋아하고 태권도도 유단자고요 쿵푸도 유단자에요. 몸 만드는 것이 중요한게 배우로서 보여줘야 될 모습을 위해 꾸준히 관리하는 차원에서 운동을 즐깁니다."
그는 지난 해 최고 흥행작 '최종병기 활'에서 한 여자를 향한 순정남 서군 역으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우로서 700만이 넘는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일일수도 있는데 그는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게 아쉽다고 전했다.
"정말 '최종병기 활'은 감사한 작품이에요. 그 해 최고 흥행작에 출연했다는 것 자체가 경사스런 일인데 그 당시엔 못 즐긴 것같아요. 당시 시상식 때 제가 영화 '작전'을 통해 신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었거든요. 그렇게 되면 다른 후보로 노미네이트가 안된대요. 사실 상을 받을 기대도 안했고요(웃음). 정지우 감독님이 저에게 '이런 기회, 이런 순간은 안 올지도 모른다. 이 순간을 즐겨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정말 충분히 못 즐겼던게 아쉽고 남들한테 놀리면서 '술 사드릴까요' 해 볼 만한데 너무 못 즐겼던 것 같아요. 제 자신을 칭찬할 시간이 없었던 거죠."
'은교'를 통해 '배우 김무열의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평을 듣는 김무열은 오래도록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 했다. 이는 배우 이순재의 강연을 듣고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오래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순재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을때 감명을 받았거든요. 선생님이 당시에 계속 연기가 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항상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신데요. 발음을 틀리지 않으시려고요. 후배로서 감동적인 시간이었어요. 저도 후배들한테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라 방향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있고 오래하고 싶어요. 저도 대본을 놔야할때가 오겠죠. 물리적인 나이도 있고 현실적 상황도 있을거고요. 하지만 계속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기가 조금씩 늘었으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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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철 기자 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