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도 이제 당당한 파인 아트(Fine art, 순수예술)로 인정받는 점이 행복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4년 만에 처음으로 런웨이를 선보였다. 주인공은 1987년 ‘현대의상전’과 1988년 ‘현대미술의상전’에 모두 참여했으며 현재까지도 파리 컬렉션 등에서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 문영희.

24년이라는 세월은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현대미술의상전’과 함께 한국 최초로 미술관에서 열린 패션쇼에 참여했던 문영희는 다시 한 번 국립현대미술관과 손을 잡으면서, 의욕적인 콜래보레이션을 선보였다.
단순히 미술관에서 패션쇼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연계 상품 출시 및 디자이너의 아뜰리에 재현, ‘변형과 형태의 자유’라는 주제의 새로운 의상 6점의 전시 등 미술에 문외한이어도 매력을 느낄 만한 프로젝트가 가득하다.
24일, 특유의 실험적인 의상 6벌이 전시된 국립현대미술관 아트숍 UUL에서 문영희를 만났다. 그는 “에너지는 많이 들어갔지만 이제 패션이 순수예술과 더욱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같아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24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패션쇼를 처음 했을 때와 달라진 점이 많을 것 같다.
▲물론이다. 그 당시에는 패션에 대한 순수예술의 문호 개방이 안됐을 때여서, 패션은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첫 전시부터 반응이 워낙 좋아서 이듬해에는 쇼까지 하게 됐다.
모두가 경이롭다는 반응이었다. 지금과 달리 높은 단을 설치해서 패션쇼를 했고, 런웨이도 훨씬 짧았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이벤트로 패션도 당당한 예술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받게 됐다.
-이번 쇼는 현재 진행중인 ‘한국의 단색화’ 전을 모티브로 했다.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한국 굴지의 작가들이 단색화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보면서 단아하면서도 작가 개인의 캐릭터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나의 의상 아카이브에서 내가 느낀 이번 전시의 특성에 어울리는 작품들을 골라 런웨이에 올리기로 했다. 한지로 구현한 여러 차원의 흰색이 주는 느낌, 강렬한 원색을 활용한 모던 아트의 느낌까지, 전시에서 받은 영감은 아주 다양하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트숍 ‘UUL'과의 콜래보레이션이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
▲아트숍에 내 작품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생활에서 친밀하게 느끼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상품은 색채 구성이나 볼륨감 모두 심플하고 이해하기 쉽고, 평생을 즐길 수 있게 만들려고 했다. 아트숍과 협업을 한다는 것은 한국의 더 젊은 이들과 내가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고 본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 ‘아트상품’을 제작하는 것이 체면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한데.
▲아마 내가 한국에만 있었다면 이런 협업을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국제적인 생각으로 다가가는 게 옳다. 베풀 건 확실히 베풀어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순수 예술 전시만을 하던 곳인데, 패션 디자이너와 협업을 제안했다는 것은 여기로서도 큰 문호 개방이다.
이런 일을 내가 한 번 하면 다음 세대 디자이너들에게도 이러한 기회가 열리게 된다. 나는 그런 것을 목표로 한다.

-아트숍에 있는 작품들에서 주목할 점은.
▲여러 가지로 많이 있지만, 값이 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웃음) 나도 디자이너 숍에서 한 벌에 200만원이 넘는 옷은 사 입기 힘들다.
그런데 디자이너 브랜드의 그런 가격은 아이디어 값이다. 이번에는 정말 원가만 받고 내 패션 철학을 담은 물건을 ‘나눠 드린다’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쉽지는 않았다.
전부 프랑스의 아틀리에에서 만들어 와서 옮기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번 협업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2년 정도 됐는데, 이제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통해 다 같이 패션을 생각하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인정받았다. 쉽지 않았던 성공의 비결은.
▲프랑스 파리는 모든 예술의 중심지이다. 그곳의 장점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캐릭터가 살아 있는 예술이라고 인정받으면 나 같은 한국인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파리가 국제적인 아티스트를 키우는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그와 같은 조건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나는 여기를 떠나면서 5년, 7년, 길게는 12년이 있어야 파리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당시에 한국 매장을 18개 갖고 있을 정도로 윤택한 생활을 버리고 간다는 것을 다들 이해 못했지만, 그만한 확신이 있었다.
큰소리 치고 가서 파리에서 사라지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서 볼 때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정말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지속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 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본다.
-이번 콜래보레이션을 접하는 이들이 무엇을 얻어갔으면 하나.
▲계속 말하지만, 패션은 순수예술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옷을 걸친다는 것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즉 자신의 인격과 영감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말하자면 자신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널리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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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