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타자가 8번 타순에 배치되는 전례는 흔치 않다. 말 그대로 타격 특화 선수이기 때문이다. 1할1푼1리의 지명타자. 그러나 베테랑으로서 힘을 갖춘 타자인 만큼 그를 버려두고 경기를 치르자니 파괴력이 아깝다. 이만수 SK 와이번스 감독이 8번 지명타자로 나서게 될 베테랑 이호준(36)에 대한 여전한 믿음을 보여줬다.
최근 SK는 타격 침체로 인해 3연패 수렁에 빠져있다. 특히 지난 24일 두산과의 홈 경기서는 4회 최정의 솔로포로 영봉패를 면했을 뿐 단 1안타에 그치며 8⅔이닝 2실점(1자책)으로 호투한 선발 마리오 산티아고의 분루를 삼키게 했고 안방을 찾은 팬들 앞에 죄송한 경기력을 펼치고 말았다. 공격적인 모습을 기대했던 이 감독의 마음도 편치 않다.
그러나 이 감독은 오히려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25일 두산전이 우천 연기된 문학구장. 이 감독은 덕아웃 화이트 보드에 적힌 ‘기본, 집중, 팀, 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말라), Be aggressive(공격적으로)'라는 문구 중 Be aggressive가 어느새 지워져 있자 “이거 누가 지운거야. 지우면 안 돼”라며 웃었다. 타격은 언젠가 하락세가 찾아오게 마련인 만큼 선수들이 투수와 싸우겠다는 투지만은 잃지 않길 바라는 이 감독이었다.

“졌다고 감독이 선수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어제일 뿐이다. 귀루 실패 본헤드 플레이로 중도 교체되었던 조인성에게도 ‘새로운 날이니 그 일을 염두에 두지 말고 투수를 잘 이끌어달라’라고 부탁했다”.
최근 부진에 얽매이기보다 타자들이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길 바라는 이 감독. 현재 SK는 베테랑 우타자 이호준을 8번 지명타자로 배치해 경기를 치르고 있다. 1994년 해태(KIA의 전신)에서 데뷔한 이래 통산 2할7푼8리 224홈런(역대 13위) 789타점을 올리며 파괴력을 갖춘 장타자로 명성을 떨친 이호준은 올 시즌 1할1푼1리(18타수 2안타)의 빈타로 아쉬움을 비추고 있다.
낮은 타율과 8번 타순 배치. 그러나 이 감독은 “이호준이 하위타순의 4번 타자 노릇을 해주길 바란다”라며 기대감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실 8번 타순은 팀 내에서 가장 타격 능력이 아쉬운 센터라인 내야수들이나 포수들이 자주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수비에 쏟을 힘을 오로지 공격에 쏟아야 하는 지명타자가 8번 타순에 배치되는 것은 자주 보기 힘들다.
그러나 타순에 관계없이 경기 중후반 이닝 별로 세분하면 선두타자가 될 수도 있고 중요한 승부처 득점권 상황에 나설 수도 있다. 이 감독은 “이호준을 믿고 있다. 4번 타자 같은 8번 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며 바닥을 치고 올라갈 이호준의 상승세를 기다렸다. 지난해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이 감독은 “변동이 잦은 4번 타순에 이호준이 자리를 잡아준다면 좋을 텐데”라며 믿음을 비췄던 바 있다.
지난 2년 간 아쉬움을 비췄던 이호준이지만 아직 그는 젊은 선수 못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 십수년 전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하고도 리빌딩의 파도에 밀려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났던 이 감독이었던 만큼 그는 이호준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고 베테랑으로서 장점을 특화한 타격으로 8번 타순에서 다시 날아오르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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