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승 vs 17승. 두 명의 투수가 거둔 개인 승수이다. 상식적으로 12승보다는 17승에 더 무게가 나가기 마련. 하지만 이 기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무게의 저울추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내려앉는다. 가볍게 보이던 12승은 어느 투수 개인이 17년간 차곡차곡 쌓은 승수이고, 17승은 투수 개인이 단 1년 만에 몰아거둔 승수라는 사실 때문이다.
장장 17년간 고작(?) 12승을 거둔 투수는 LG의 류택현(41)이고, 17승은 2011시즌 다승 1위를 차지한 KIA 윤석민의 성적이다. 중간계투 전문인 류택현과 선발로서의 보직을 갖고 있는 두 투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둘을 끌어다 붙인 것은 그만큼 빛을 내기 어려운 중간계투 투수들의 처지를 한번 더 돌아보기 위함이다.
과거 1994년부터 2007년까지 14년간 태평양과 현대에서 중간계투 임무를 주 보직으로 234경기에 등판했던 좌완 김민범의 프로통산 승수는 딱 1승뿐. 2000년 6월, 동점상황에서 올라와 한 명의 타자만을 상대하고 내려간 뒤, 운이 닿아 감격의 데뷔 첫 승을 기록할 수 있었던 그는 통산 2승이라는 소박한 꿈을 꿨지만 더 이상의 천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김민범을 들었지만 이외에도 중간계투 전문 투수들의 성적은 활동연도나 출전 경기수 대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마운드에 오르는 횟수는 잦지만 투구이닝은 길어야 1이닝, 아니면 왼손 대 왼손, 오른손 대 오른손 등의 특화된 상황을 목적으로 한 두 타자만을 반짝 상대하고 내려가야 하는 특성상 승리투수로 기록될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투구하고 있는 동안 팀이 제때 리드를 만들어내야 하고, 어쩌다 운이 닿아 앞서가는 점수를 올렸다 해도 뒤에 나오는 주력투수들에게 승리투수 기록을 상납(?)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서두에 예로 든 류택현의 2012시즌 초반 행보를 보면 그야말로 대운(大運)이 트인 모양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예상치 못한 갈비뼈 부상으로 재활군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그 이전까지 류택현은 개막 이후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중간계투로만 올라와 무려 3승을 챙겼다. (프로 18년 차인 류택현의 시즌 최다승은 2009년에 거둔 4승이 최다기록이다)
6경기에 나와 3승을 쓸어 담는 동안 그가 던진 투구이닝은 총 6과 1/3이닝. 선발투수가 한 경기에 나와 어느 정도 던지고 물러났을 때의 기록과 비슷한 수치다. 투구이닝 대비 승수 취득률이 실로 어머 어마하다. 15이닝 동안 200개가 훨씬 넘는 많은 공을 던지고도 1승을 가져가지 못하는 사례에 비하면 투자대비 수익률은 복권당첨급이다. 물론 매일 매일이 경기출장과 등판대기의 연속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한 보직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단순한 통계기록으로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현재 투수 전체를 대상으로 특정 개인의 한 경기 최다투구수 기록은 232구(15이닝)로서 퍼펙트게임으로 잘 알려진 선동렬의 1987년 5월 16일(사직)자 기록이 최다기록으로 연감에 올라있다. 2-2 무승부로 끝난 이날 선동렬의 투자대비 체감수익률은 완전 마이너스였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달랑 공 1개만을 던지고도 승리투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통산 10차례 이 기록이 작성되었는데 류택현의 이름도 보인다. 2000년 6월 14일 삼성전(잠실)에서 따낸 기록으로, 자기자본을 거의 들이지 않고 목돈(?)을 마련한 격이다.
또한 투구수 대비 수익률로 따져볼 때 롯데의 최대성도 무시할 수 없는 극강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5월 3일 넥센전(목동)에서 2-2 동점이던 8회말 2사 후 등판, 공 1개로 타자를 처리해 이닝을 마친 이후, 돌아선 9회초에 소속팀 롯데가 4-2로 리드를 잡아낸 덕분에 통산 10번째의 최소 투구수(1구) 승리투수로 기록된 바 있었던 최대성.
최대성은 그보다 5일 전인 4월 28일 LG전(사직)에서 3-3으로 맞서던 8회초 1사 후 마운드에 올라와 두 명의 타자를 모두 초구에 외야플라이로 막아내면서 역시 8회말 팀이 결승점을 뽑아준 덕분에 1811일 만의 승리이자 시즌 첫 승을 올릴 수 있었다. 최대성의 투구수는 1+1인 2개였다. 이를 합하면 최대성은 공 3개로 2승을 챙긴 것으로 프로 역사상 최대, 최고의 효율적인 투자 수익률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때를 맞춰 결승타를 때려준 선수가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전준우였다는 점은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편 지난 역사 속에서도 류택현이나 최대성과 비교해 만만치 않았던 수익을 올렸던 선수를 만나볼 수 있는데, 2009년의 삼성 최원제가 비슷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그 해 최원제는 신인급인 데뷔 2년 차의 햇병아리 선수였지만 4월 24일~5월 6일 사이에 중간계투로만 등판해 역시 천운을 타고 순식간에 3승을 챙겨갔었다. 그 중 5월 5일~6일 한화전(대전)서 이틀 연속으로 승을 따내는 과정에서 그가 던진 총 투구수는 불과 8개(1+7)뿐이었다. 3승을 거두기까지의 투구수를 모두 합친다 해도 겨우 16개(8+1+7)로 노력대비 실로 엄청난 수확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류택현의 얘기로 돌아와 2010년 후반 웬만한 선수라면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인 마흔 줄에 찾아온 왼쪽 팔꿈치 부상으로 은퇴의 기로에 서기도 했지만, 2011시즌을 통째로 쉬는 사실상의 은퇴나 다름없었던 기간 동안에도 포기하지 않고 선수로서의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던 그의 집념과 노력을 하늘도 가상히 여긴 것은 아닌지.
지난 4월 13일 KIA전(잠실)에서 류택현은 개인 통산 814번째 경기에 출전함으로써 조웅천(SK)이 갖고 있던 종전 투수부문 통산 최다경기출장 기록(813경기)을 넘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젖혔다. 개막을 일주일 앞둔 지난 3월말 이종범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졸지에(?) 현역 최고령 선수자리에 오르게 된 류택현이 언제까지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지만, 투수로서 1000경기 출장을 꼭 이뤄보고 싶다는 포부대로 그의 아름다운 도전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