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의 여러 이론 중에 ‘인본주의 상담’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상담을 받는 사람(이하 내담자)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추어진다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나고 드러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인본주의 상담에서 상담자의 임무는 단지 내담자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전부이다.
선수가 경기장에서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 기량을 부단히 연마하고 실제 경기에 나가 실력을 갖추는 노력을 꾸준히 하기만 하면 절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연습과 경기로 피로가 누적되기도 하고, 갑자기 자신의 플레이의 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경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개인사로 인해 영향을 받기도 하고, 상대하기 껄끄러운 선수를 만날 수 도 있고, 출전을 못할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부상이 찾아 올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선수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드러내는데 도움이 되는 상황보다 실력발휘에 장애가 되는 상황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래서 선수들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는 것의 중요성이 늘 강조된다. 하지만 강한 ‘멘탈’을 갖추는 것은 전적으로 선수의 몫이지만은 않다.

선수가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이 제공될 때 비로소 선수가 가진 참된 능력이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감독은 선수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환경 중 하나다. 감독들 마다 자신의 이론이 있으며, 그 이론을 바탕으로 선수에게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2012년 시즌부터 두산을 이끌고 있는 김진욱 감독은 선수에게 필요한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이다. 감독의 진심이 잘 느껴지도록 전달하는 재능이 그것이다. 이는 김진욱 감독이 ‘달변가’라거나 논리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일관되게 선수들의 마음을 들어주는 자세와 노력 덕분에 감독의 진심에도 믿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올해 초 선수들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김진욱 감독은 선수가 자신의 리더십을 스스로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선수들에게 최대한 권한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요즘 두산 경기를 지켜보면, 김진욱 감독은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으며 적어도 몇몇 선수들은 김진욱 감독이 선수들에게 제공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선수들이 믿어줄 만큼 자질이 있느냐를 우선 고려했다면 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 확실히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2003년 1차 지명으로 두산에 입단했지만 주로 2군에서 보냈던 노경은이 5년 만인 지난 6월 17일에 선발승을 거두고 눈시울을 붉혔다. 노경은은 승리 후 인터뷰에서 2군에 있을 때나 1군에 있을 때나 하나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준 김진욱 감독에게 승리의 공을 돌렸다. 투수로서 위력적인 빠른 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공을 마운드에서 제대로 뿌리지 못했던 노경은이 최근 경이로운 탈삼진 행진을 벌이며 선발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에게 제공되었던 ‘환경’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기장에서 자신의 권한을 감독과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선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김진욱 감독의 감독 스타일은 눈에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그의 리더십이 두산을 우승으로 이끌지도 아직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시쳇말로 감독이 하는 야구, 프런트가 하는 야구가 아니라 진짜 선수가 온전히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두산 선수들에게 주어졌다. 자신의 플레이 권한을 자기에게로 가져오는 선수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난다면 두산의 성적은 앞으로 기대해 볼만하다.
김나라 고려대 학생상담 센터 상담교수